문서사료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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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화요일: 자유의 여신은 이렇게 부활하였다
등록번호 : 00850322
날짜 : 1960.06.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요약설명 : 피의 화요일: 자유의 여신은 이렇게 부활하였다 1960년 이승만정권의 독재와 부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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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애<하> - 십년간의 이별
등록번호 : 00946053
날짜 : 1995.01.07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사랑, 견디기 힘든 제8장 차라리, 속절없이 제9장 27일, 피의 화요일 제10장 끈질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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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의 야만
등록번호 : 00946548
날짜 : 2001.10.14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한국 매카시즘과 조봉암의 죽음 / 정 태영 제13장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 오유석
사료 콘텐츠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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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혁명 구호(Slogan of April Revolution)
요약설명 : 4월혁명 58주년 기념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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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 4.25교수단시위에서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까지
요약설명 :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기붕을 사퇴시키고 국무위원 일부를 경질시키는 것 등으로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이는 이승만 체제를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4월 25일 교수들이 시위에 나서자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4.19혁명은 4.25교수단시위 이전에는 지식인이나 교수 사회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학생들이 주도했고 시민 중에는 실업자나 구두닦이 등 기층민중들이 다수 참여했다. 서울대 이희승, 연세대 정석해 등의 교수들이 비밀리에 모여 학생들의 피에 행동으로 답할 것을 결의했다. 각 대학 258명의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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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문으로 본 4.19혁명
요약설명 : 싸워나가겠노라고 결연히 선언했다. 얼마 후 우리는 경무대 쪽으로 몰려갔다. 우리 앞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경무대 입구 가까이 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곧 이어 격렬한 총성이 울려 퍼졌고, 많은 학생들이 쓰러졌다. 김치호도 그 중의 하나였다.... (서울대 장회익 교수 글 중에서) 김치호는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이날, 불의한 정권 타도를 위해 시위에 나가 죽음을 맞이한 서울대생 6명 중 한 명이었다. 경무대에서 경찰의 실탄 발포로 시민, 학생 수십 명이 사망, 부상당했고 전국적으로 124명이 사망, 558명이 부상당했다(정부 발표). 이에 4월 25일 전국 교수단이 14개항 시국선언문을 채택한 후,...
일지사료 6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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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요약설명 : 학생들과 응원 군중들로 말미암아 교통이 완전히 마비되었다. 시위가 점점 격렬해지자 정부는 서울과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대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경찰은 요소요소에서 이들을 제지하려고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으며, 경무대 앞과 이기붕 집 앞, 내무부 앞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경찰이 발사한 총에 수 십 명이 사상을 당하였다.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던 광주와 부산에서도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대구와 인천, 청주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언론들은 이 날을 “피의 화요일”로 명명하였다. 이 날 폭발된 각 대학의 선언문, 결의문, 그리고 격문 등은 사이비 민주주의의 독재를 배격할 것과 시위가 이적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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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앞 바리케이드 뚫자 무장경관 발포, 사상자만 수 십 명
일자 : 1960.4.19
분류 : 시위 상황 > 서울
요약설명 : ‘피의 화요일’은 이렇게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오후 2시 경, 옥인동과 통의동 일대의 병원들은 총상을입은 중상자로 가득 찼다.경무대 앞에서 하복부에 총상을 입은 서울대 수학과 3학년 김치호는 위독한 상태로 수도육군병원에 후송되었으나 “제발 저 어린 동생들부터 살려달라”고 하고 자신은 숨을 거두었다. 일부 기록에는 김치호가 숨을 거둔 시각을 20일 새벽 6시로 기록하고 있다(조화영 편, 115쪽). 그러나 조선일보는 19일 밤 10시 경 사망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1960. 4. 24 석3면). 이날 계엄이 선포되기도 전에 군중에게 총을 쏘도록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가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4월혁명의 성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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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자 : 1960.4.20
분류 : 시위 상황
요약설명 : ‘피의 화요일’이 지난 후에도 시위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각지에서 학생들은 계엄령에 따른 휴교지침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왔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광주에서는 시위대가 강력하게 제지하는 군인들에게 기왓장 투석으로 맞서며 대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발생했지만 큰 희생 없이 마무리 되거나, 미리 정보를 얻은 경찰의 제지로 좌절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