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9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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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부시 반대국민투쟁기간/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운동탄압 책임자 노태우 정권 규탄 ...
등록번호 : 00069628
날짜 : 1989.00.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서울민주시민연합
요약설명 : 군사독재정권의 후계자인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며, 전국적인 반대 집회 등을 계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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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부시 반대 국민투쟁기간,광주 학살 5공비리 민중운동 탄압 책임자노태우 정권 규탄 및...
등록번호 : 00485461
날짜 : 1990.02.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대전충남민주화운동계승...
요약설명 : 노태우 부시 반대 국민투쟁기간, 광주학살 5공비리 민중운동 탄압 책임자 노태우 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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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당에 보내는 글[노태우정권 반대]
등록번호 : 00020998
날짜 : 1990.11.0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사진사료 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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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종선을 반대! 노태우정권 타도" 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위중인 시민들의 모습
등록번호 : 00704217
날짜 : 1990.00.00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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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전 반대와 노태우 정권 퇴진을 부르짖는 서울동부지구 대학 총학생회장들
등록번호 : 00709456
날짜 : 1991.01.22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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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 광장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와 페만전쟁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
등록번호 : 00746981
날짜 : 1991.01.22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박물사료 1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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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의 죽음 31년째, 중앙대 총학생회장 이내창
요약설명 : 의문의 죽음 1989년 8월 15일 오후 6시 30분경 거문도에서 한 남성의 시신이 떠올랐다. 수심이 얕아 가족 단위의 관광객이 자주 찾던 유림해수욕장 바닷가 부근에서 인근 주민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그는 중앙대학교 총학생회장이던 27세 이내창이었다. 이내창은 1962년에 태어나 85년에 군을 제대한 후 86년에 중앙대학교 조소학과에 입학한 늦깍이 대학생이었다. 88년에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맡고, ‘민족미술연구회’ 학과 동아리를 창립하여 ‘청년미술대학 여름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민족미술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89년 중앙대학교 안성 교정 총학생회장을 맡아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섰다. 죽음을 둘러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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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_ 개발독재의 희생양에서 농민운동의 구심점으로
요약설명 : 운영 실태마저 드러나 농민들에게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1988년에 등장한 노태우 정권은 전두환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듯했으나 말뿐이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추곡 수매에 대한 국회동의제가 실시되는 등 전향적인 흐름이 보였으나 실제로는 지지부진했다. 노 정권의 유화적인 제스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농촌의료보험개혁투쟁과 농지개량조합의 비민주적 운영에 항의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대중투쟁의 일환으로 수세투쟁과 농산물제값받기투쟁을 병행하기로 결의한 농민들은 1988년 11월 1일 전국수세폐지대책위원회 등을 꾸렸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400여 차례에 걸쳐 수세 폐지와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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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련과 분신정국 - 죽음의 굿판이었나, 희망의 몸부림이었나
요약설명 : 적중하였다. 김기설의 죽음을 ‘유서대필사건’이라는 엽기적 사건으로 물꼬를 돌려놓은 노태우 정권은 정원식 총리서리가 외국어대 강의를 나갔다가 학생들에게 밀가루 세례를 받은 것을 계기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연이은 분신으로 최대의 위기를 맞았던 정권이 반전의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김지하는 어떤 대담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젊은 후배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지난 십년은 참으로 덧없는 세월이었어요. 돌아간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립니다. 편치 않는 마음으로 인해 젊은 영혼들의 환상이 며칠 씩 나타나 뜬 눈으로 밤을 지샌 적도 있어요. 말썽 많은 조선일보라는 매체를 선택한 것도 잘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