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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비교연구회 발족
일자 : 1963.10.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학생들은 민족주의, 특히 한국의 후진성과 분단의 책임을 강대국 정치와 제국주의적 식민정책에서 찾으려는 제3세계 민족해방주의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이종률, 「(증언) 6·3사태는 ‘젊은 민족정신’의 발화였다」, 『신동아』 1994년 6월호, 562~566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 2008, 408쪽 한일회담반대투쟁 시작 당시 민비연 학생들의 지향은 3·24시위 때 나온 서울대 문리대의 선언문과 결의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이들은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자본이 민족자본을 침식, 예속시켜 매판자본화 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한편, “우리의 결의와 행동이 ‘신제국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의 기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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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태 등 공소장 내용 발표 정부전복기도내란죄를 적용
일자 : 1964.6.17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민비연 내란음모 사건’, 1967년의 ‘민비연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이 있다. 이 사건들은 각기 명칭은 달랐지만 사실상 6·3항쟁이라는 한 가지 사안과 같은 인물들에 대한 상징적 정치 재판이라고 하여 이를 각각 1, 2, 3차 민비연 사건이라고 부른다. 1차 민비연 사건과 관련하여 당국은 최고 15년의 중형을 구형했지만 재판부에 의해 번번이 묵살됐다. 결국 내란죄 부분은 삭제되고, ‘소요 및 집시법’ 위반 부분만 적용되었다. 결국 이들은 구속 140여 일 만인 1964년 10월 28일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이라는 가벼운 형을 받고 석방되었다. 그런데 1차 민비연 사건은 민비연의 조직 사건이 아니라 6·3항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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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비교연구회 정부 지시에 따라 해체
일자 : 1965.9.16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1965.9.18 석7면, 『경향신문』 1965.9.18 석7면, 『대학신문』 1965.9.20 1면) 민비연의 해체는 정부가 학교 당국에 “정치활동을 하는 학원 내 ‘서클’을 즉시 해체시키라”는 지시가 내린 후, 학교 당국에서 민비연 지도교수 황성모 교수에게 “교직을 사퇴하든지 지도교수직을 탈퇴하든지 하라”는 지시를 내려, 9월 7일 황 교수가 유기천 총장에게 ① 지도교수직을 탈퇴하겠다. ② 정치에는 관련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제출하고 총장의 다짐을 받고, 11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자동적으로 해체되었다. 학교당국은 “학칙에 학생들의 서클은 지도교수가 구성요건으로 되어 있어 지도교수가 없게 될 때에는 그 서클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