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우홍선'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31건
-
문서사료 14건
-
- 1974년 4월 : 실록·민청학련 3
-
등록번호 : 00921282
날짜 : 2004.10.15
구분 : 문서류 > 단행본
기증자 : 김근태재단
요약설명 : 허구다_우홍선 인혁당의 산실은 중앙정보부다_송상진 인혁당은 민청학련과 무관하다_...
-
- [호소문-우홍선의 처 강순희]
-
등록번호 : 00483226
날짜 : 1975.01.09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요약설명 :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우홍선의 처 강순희가 쓴 호소문
-
- 국민의 소리 No.5
-
등록번호 : 00893219
날짜 : 1975.05.00
구분 : 문서류 > 정간물
기증자 : 이종수
요약설명 : 박정희의 교회 탄압 및 비밀 재판 등에 관한 내용 기재
-
-
사진사료 2건
-
- 8명의 사형이 확정되자 울고 있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관련된 가족들
-
등록번호 : 00709985
날짜 : 1975.04.08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우홍선, 여정남 등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하고 9일 오전 서울구치소에서...
-
-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문을 읽고 있는 재판장
-
등록번호 : 00709988
날짜 : 1975.04.08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여정남 등 인혁당 관련자 8명의...
-
-
사료 콘텐츠 2건
-
- 인혁당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
요약설명 : 재구속되기도 하였다. 1975년 4월 8일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인 이튿날 사형이 집행되었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회는 이를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 규정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혁당사건 32년만인 2007년에 열린 재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무기징역 등의 형을 살았던 17명에게도 2008년부터 2013년에 걸쳐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옥고를 치른 17명 중 16명의 가족들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09년 6월 19일 인혁당 관련자 16명, 가족 포함...
-
- 약자들의 편에 서서 - 조지 오글 목사
-
요약설명 :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이 일본 또는 미국 어딘가에 버려질지 모른다고 걱정했던 것이다. 그는 우홍선이 아내의 품으로 돌아오면 그녀에게 반지를 돌려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우홍선은 돌아오지 못했고 반지도 돌려주지 못했다. 20년간 한국에서의 선교생활을 강제 종료당한 그는 비행기 트랩에 오르며 한국말로 “대한민국 만세, 하나님과 함께!”라고 외쳤다. 그를 태운 대한항공 002호기가 태평양 위로 빠져나와 간식이 제공되었을 때, 한 여승무원이 그의 앞에 식판을 놓고는 무릎에 엽서 한 장을 슬며시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서둘러 갔다. 그 엽서를 읽었다. “오글 목사님, 안녕히 가십시오. 저는 한 젊은이입니다. (제 이름을 쓸...
-
-
일지사료 13건
-
-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주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 열려
-
일자 : 1961.5.13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이 구호는 최백근, 신학우, 우홍선, 김영옥 등이 대회 준비모임을 가질 때 만든 것이었다. 이 구호는 이후 통일운동 집회에서 단골로 등장하게 된다”고 서술하였다(김민희, 앞의 책, 189쪽). 그러나 민자통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이종린은 1961년 5월 13일에 열린 남북학생회담환영 및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역사적인 구호가 처음 나왔다고 증언하였다(「현대사발굴 이종린의 현대사 회고ℼ 민자통과 통일운동」, 『민족21』, 2006, 127쪽). 신문기사들을 검토해보면, 5월 10일 민자통 서울특별시 결성대회에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13일 대회에서는 해당 구호가 언급되고 있어 이종린의...
-
- 인민혁명당 관련 10명 현상수배
-
일자 : 1964.9.2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정부·여당·군
요약설명 : 석방되었으며, 석방된 틈을 타서 우동읍과 같이 월북했다고 한다. 김배영은 1967년 초에 남파되었을 때 검거되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한다.(김경재, 『혁명과 우상 2: 박정희와 중앙정보부』, 인물과 사상사, 2009, 271~272쪽)을 중심으로 서울 서대문구 부암동 348의 345를 아지트로 하여 ‘북괴노동당’의 강령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을 창설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는 우홍선, 양춘우 등 10명이다.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명단과 현상금은 다음과 같다. ▶10만 원 양춘우(29, 서울문리대 졸) 우홍선(55, 예비역 육군대위) ▶1만 원 김규철(30, 북부산고등학교 교사) 하상연(31, 부산대 졸) 박종열(25, 서울문리대 중퇴)박범진(25,...
-
- 중앙정보부, 민청학련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발표
-
일자 : 1974.4.25
분류 : 정치·국제관계 > 정부·여당
요약설명 : 가운데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은 1975년 4월 9일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지 20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집행을 당했다. 즉 2차 인혁당사건은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건이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 2005년 12월 27일 재판부는 2차 인혁당사건(인혁당재건위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였다. 2007년 1월 23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 8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2007년 8월 21일 인혁당재건위사건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의 소에서 서울지방법원은 국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