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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인혁당사건(인민혁명당재건위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의 배후 세력으로 인혁당을 지목하고, 관련자들을 잔혹하게 고문하여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으로 조작하여 8명을 사형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에게 무기징역 등 장기 형량을 선고한 사건이다.

가족들의 면회는 물론 변호사들의 접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형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계하지도 못할 정도의 고문이 행해졌으며, 가족들 역시 수사기관에 끌려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족들은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아이들은 동네에서 빨갱이의 자식이라고 해코지를 당해야 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한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추방을 당했으며,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김지하 시인은 감옥에서 인혁당사건으로 붙잡힌 이들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과 보고 들었던 것을 <동아일보>에 <고행 1974>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다가 3회 만에 반공법으로 재구속되기도 하였다.

1975년 4월 8일 도예종 여정남 김용원 이수병 하재완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등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8시간 만인 이튿날 사형이 집행되었다. 제네바의 국제법학자회는 이를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 규정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혁당사건 32년만인 2007년에 열린 재심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무기징역 등의 형을 살았던 17명에게도 2008년부터 2013년에 걸쳐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옥고를 치른 17명 중 16명의 가족들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09년 6월 19일 인혁당 관련자 16명, 가족 포함 총 77명의 원고 앞에서 법원은 "국가가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미 17명  중 4명이 옥사나 복역 후유증으로 사망한 후였다.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금의 기산일을 1975년 4월 9일로 했다. 1심 재판 직후 이들 77명은 배상금의 65%인 약 400억 원 가량을 수령했다. 최종 판결이 나면 나머지 35%의 배상금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2011년 1월 27일 대법원은 지연손해금 가산일을 변경하는 '파기 자판'을 했다. 배상금에는 배상지연금으로 이자 5%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재심 무죄 판정이 난 이후(2008년~2013년)부터 배상금 이자를 계산을 해야 맞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린 것이다. 즉 1979년부터 2007년까지 배상액에서 이자 5%는 제외한다는 것이었다. 

대법원은 자판을 함으로써 피해자들이 파기환송심을 통해 위자료액을 다툴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대법원이 '자판'을 해버리면, 그 자판에 대한 시비를 가릴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는 사실상 전무하다. 자판에 대한 재심 청구를 할수는 있지만 대법원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인 2013년 7월, 인혁당사건 피해자 77명에게 지급된 보상금 일부를 반환하라는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소송’ 소장이 날아들었다. 소송 원고는 인혁당사건을 조작하고, 억울하게 사람을 죽인 국가정보원이었다. 졸지에 피고가 된 인혁당 피해자들은 탄원서도 내고 법정투쟁을 했지만 결국 모든 재판에서 졌다. 

이자는 20%가 적용되었다. 인혁당 가족들은 일부 받은 배상금을 넘어선 이자로 집은 경매당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오갈 데 없이 길거리로 내몰려야 했다. 

또 한번 정권이 바뀐 지금, 인혁당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