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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 국민장 거행

25일,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의 국민장이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사망 열흘 뒤, 그리고 유해 환국 5일만인 25일 오전 10시에 열린 장례식에는 각계 인사와 일반 시민들이 참석하여 고(故) 조병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였다.
‘고(故) 유석 조병옥 장례위원회’예식부 책임위원 이성주의 개식 선언과 육군 군악대의 주악으로 국민장이 시작되었다. 조용순 장례위원장은 식사를 통해 조병옥의 창업은 건국청사에 남을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이어 김도연 민주당 대통령후보 선거사무장이 조병옥의 약력을 보고하였으며 묵도가 이어졌다.
이기붕 국회의장(이재학 국회부의장 대독)의 조사(弔詞)와 최인규 내무부장관, 김두일 대법관 등의 헌화 후 사회 각층의 조사가 이어졌다. 조사 이후에는 수도여자고등학교 합창단이 조가‘큰 별이 떨어졌다. 땅을 치고 통곡하라.……’를 불렀다.고(故) 조병옥 조가는 1960년 2월 20일 일지 참조. 오전 11시 15분 경, 육군 의장대 3발의 조총과 함께 영결식은 막을 내렸다. 영결식 이후에는 잠시 숙연한 시가행진이 이어졌다. 장지인 우이동까지 이동할 때는 수 십 만의 서울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같은 시각, 전국 각지에서도 자체적인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추모식은 음양으로 방해를 받아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지 못하였다. 갑작스런 동민회가 소집되거나 심지어 극장표를 무료로 나눠주고 막걸리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부산에서는 오전 10시 동광국민학교 강당에서 각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으나 극히 제한된 조객만 입장이 가능하였다. 경찰은 장내가 꽉 찼다며 시민들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부산 시내 각 기관은 국민장임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지시로 조기를 달지 않았다.
대구에서는 오전 10시 15분부터 약 1시간 동안 민주당 당사에서 약 200명이 모여 추모식을 진행하였다. 오전 8시부터 민주당사 주변에는 많은 수의 사복경찰들이 모여 일반 시민들의 출입을 제지하는가 하면 당사 주변 동회에 근무하는 서기가 수첩을 들고 자신의 동네 사람들이 추모식장에 입장하는지 여부를 기록하다가 민주당 당원들에게 붙잡혀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광주에서는 오전 10시 민주당 전남도당 사무실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경찰은 민주당원 이외 시민들의 참석을 제한하여 원성을 샀다. 목포에서는 역전광장에서의 추모식을 준비했으나 방해로 인해 좁은 당사 안에서 열게 되었다.
전북 이리(현 익산)에서도 오전 10시 남성고등학교 강당에서 추모식을 갖기로 하였는데 경찰이 갑작스레 집회 허가 문제로 중지시켰다. 경찰은 옥외집회 금지를 내세우며 상부의 명령이라고 하였다. 정오 쯤 겨우 익산 당부 주선으로 당 사무실에서 수 십명의 당원들만 모인 가운데 간소한 추모식이 진행되었다. 전주에서도 오전 10시 약 1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는데 앞서 방장이 일일이 집을 방문하여 추모식 불참을 요구하여 일반 조객은 겨우 30명 정도였다.
대전에서는 오전 10시 20분부터 추모식이 열렸는데 방장들이 가지각색의 회의를 소집하여 시민들의 추모식 참석을 방해하였다. 대전 시내는 조기도 거의 달지 않았으며 강원도 강릉에도 조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각 지방에서 조병옥 추모식이 방해를 받자 장례위원회는 최인규 내무부장관에게 진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는‘고(故) 조병옥 박사 추도식 준비위원회’가 민단 주도로 조직되어 25일 오전 10시부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조선일보』1960. 2. 25 조3면, 1960. 2. 26 조1·3면 ; 『동아일보』1960. 2. 26 조1·3면, 석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