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 학원의 자유 외치며 시위

민주당 부통령후보 장면선거 강연회가 대전공설운동장(현 한밭운동장)에서 열린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오후 4시경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동아일보』는 1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고 하였으나『조선일보』는 약 400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보도하였다.『한국일보』는 1천여 명 중 700명이 담을 넘어 시위를 시도했으나 교사 등의 제지로 350명만이 시위에 참가하였다고 하였다(『조선일보』1960. 3. 9 조3면 ;『동아일보』1960. 3. 9 조3면 :『한국일보』1960. 3. 9 조3면).『대전일 보』는 시위가 3시 30분에 시작되었다고 보도하였으나 시위에 가담한 학생 숫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시위 시작 1시간 뒤에 약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고 밝혔다(『대전일보』1960. 3. 9 조3면).『중도일보』는 약 300명이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보도하였다(『중도일보』 1960. 3. 9 조3면). 여당지인 서울신문은 가장 적은 숫자인 200명의 학생이 충청도의 소극성을 없애고 명성을 얻기 위해 시위를 전개했으며 모 당이 이를 사주하였다고 보도하였다(『서울신문』 1960. 3. 9 조3면). 또 다른 기록은 약 1천여 명의 전교생이 학교를 빠져나와 시위에 가담하였다고 밝혔다(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77쪽). 대전고등학교 측 자료는 8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장 관사 앞에 운집했다고 하였다(대전고등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대전고 60년사』, 1977, 182-187쪽). 충청남도 측 자료도 800여 명이 시위를 감행했다고 하였다(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충청남도지』상, 1979, 446-449쪽).전날인 7일 오전 대전고 교장은 학생 간부들을 교장 관사로 불러 다음날 예정된 장면 민주당 부통령후보 강연회에 참석치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방과 후 모임을 갖고 지난 2월 28일 대구에서의 시위를 상기하며 대전 지역에서도 전체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후 8시경 대전고 학생들은타 학교의 동정을 살핀 후, 대전고 단독으로라도 시위를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안동일·홍기범 공저, 73-75쪽 : 3·8 민주의거기념사업회·대전·충남4·19 혁명동지회,『3·8민주의거』, 2005, 26-27쪽
대전고 학도호국단 대대장 박제구(2학년)와 운영위원장 박선영(2학년) 등은 학생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시위 날짜를 민주당 강연일인 8일로 정하였다.『한국일보』1960. 3. 9 조3면시위 감행 시간도 강연이 예정된 오후로 잡았다. 이들은 늦은 밤까지 결의문과 구호를 작성했으나 사전 발각을 염려하여 플래카드는 만들지 않았다.
8일 오전 시위 계획을 미리 탐지한 교장은 1·2학년 대표 19명을 교장 관사로 불러 시위의 부당성에 대해 설교하고 학생대표들을 감금하였다.이날 감금된 학생 대표가 11명이었다는 보도도 있다(『한국일보』1960. 3. 9 조3 면).이날 아침 이미 시위계획을 주지하고 있었던 나머지 학생들은 교장 관사로 몰려가 학생대표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외치고, 2학년 학생 홍석곤이 그 자리에서 결의문을 낭독했다. 교장이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에 감금됐던 학생 19명은 밖으로 뛰쳐나왔다.
결의문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大高)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여러가지 우리의 뜻에 배치되는 도당국과 학교의 처사에 대하여 그 잘못을 깨닫고 조속히 학원의 자유보장과 대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강력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며, 이로써 대고의 명예와 우리의 앞날을 더럽히지 않도록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一.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二. 자유로운 학생동태를 감시 말라.
三.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단호히 배격한다.
四. 진리를 탐구하는 신성한 학원에서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
五.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六. 오늘을 기하여 거행함은 다만 학생들의 사기가 왕성한 때문이다.
七.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을 때는 동맹 휴학도 불사한다.
출처 : 안동일·홍기범 공저,『기적과 환상』, 영신문화사, 1960, 75-76쪽
결의문 낭독과 동시에 전교생은 교실에서 나와 교문으로 혹은 담을 넘어 학교를 빠져나와 행진을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①학생들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 ②학원의 자유를 달라, ③학원에서의 선거운동을 배격한다, ④우리의 말을 억제하지 말라, ⑤『서울신문』구독을 강요하지 말라”는 5개 구호를 외쳤다.당시 대전고 교내에서는 선거운동 기미가 짙어지고 있었다. 수업을 중단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미국에서 했던 방송을 트는가 하면 이기붕의 뉴스 영화를 강제로 관람케 하였다. 가정방문을 명목으로 자유당 선거운동이 활발했으며 학교 내에서도 사복경찰이 학생들을 감시하였다. 서울신문 강제구독에 대해서는 학교 자치회에서 여러번 구독하지 않기로 결의했었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의 불만은 계속 쌓여 갔다(안동일·홍기범 공저, 73-81쪽).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은 당초 ‘학교→공설운동장→인동시장→대전 전신전화국(현 원동네거리 KT 대전지점)→대전역→도청→학교’로 코스를 잡았으나 얼마 못 가 공설운동장 앞에서 무장경찰과 충돌해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장면이 연설 중인 공설운동장 앞 약 200미터 거리까지 몰려온 학생 300여 명은, 기마경찰에 의해 장총 개머리판으로 머리와 허리를 강타당하는 등 유혈 진압을 당하며 백차에 강제로 태워져 연행되었다. 소방차도 동원되었는데 소방차는 학생들에게 까만 페인트와 물세례를 퍼 부었다. 학생들은 “민주경찰이 학생을 왜 구타하는가”라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근처 논길에 뿌려진 똥물에 빠져 악취를 풍기면서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문창동 75번지 판자 울타리는 경찰과 학생의 육박전으로 모조리 부서졌다.
대흥동 로터리 앞에서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 발생을 미리 탐지하고 대전시 내각 학교를 포위 경계하고 있던 경찰과 충돌하였다.경찰은 3월 7일 학생들의 시위 계획 정보를 입수하고 대전 시내에서 경비를 강화하고 7일 밤부터 불량 학생 등을 단속 하였다(『대전일보』1960. 3. 9 조3면).경찰은 개머리판으로 학생들의 머리를 난타하였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면서 대항하여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때한 교 사는 학생을 구타하는 경찰관을 말리다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었다.
대전역에 이르러 학생들은 또 다시 경찰과 충돌하였다.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경찰에 대항하였지만 경찰은 백차는 물론 기마순경과 소방차까지 동원하여 학생들을 제지하였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스크럼은 무너지고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은 애국가를 부르며 대전천을 따라 중앙시장을 거쳐 중교(中橋)를 건너 대전서여고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버스 합동주차장에서 경찰과 잠시 충돌 하였지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줄 것을 요구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다른 한 무리는 돌을 던지며 경찰에 저항하다가 목척교(木斥橋) 맞은편 신도극장사 잇길(현 목척교를 중심으로 중동방면의 천변도로)로 빠져 다른 학교와 합세할 목적으로 보문고등학교로 달려갔다. 그러나 보문고 교문은 이미 닫혀있어 선화교(현 영교)를 건너 시청(현 중앙로 네거리 동양백화점(갤러리아) 맞은편 삼성건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칠대로 지친 학생들 주위로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왔다. 학생들은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는데 경찰관의 구타에 “주먹으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 대항한다”고 외치며 “학원의 자유를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평화적 시위에 경찰이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자진해서 질서있는 시위를 약속하고 학교로 돌아갔다.
이로서 오후 4시 경부터 일어난 대규모 대전고 학생 시위는 약 40분 후에 경찰의 총부리에 의해 해산되었다.조선일보는 이날의 시위가 1시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보도하였다(『조선일보』 1960. 3. 9 조3면).경찰은 1명의 교사와 40여 명의 학생을 연행했고 40여 명의 학생들을 대전고 교실에 강제 수용했다.동아일보 보도와 달리 조선일보와 한국 일보는 이날 연행된 학생이 61명이라고 밝혔다(『조선일보』1960. 3. 9 조3면 :『한국일보』1960. 3. 9 조3면). 약 50명 이었다는 기록도 있다(안동일·홍기범 공저, 80쪽). 일부 기록은 2명의 교사와 100여 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고 하였다(조화영 편,『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79-291쪽).학생들은 교내 농구장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날 학교에 강제 수용된 학생들은『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학원의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는 뜻에서 시위를 한 것이요 정치적인 의도는 추호도 없다. 더구나 선거운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경찰관들은 우리들을 총대로 두들겨서 혹은 머리가 터지고 혹은 팔이 부러지고 어떤 학생은 허리를 다쳤다”며 울분을 토로하였다. 시위 중에 자유당 선전차는 학생 시위 중지를 호소하며 민주당이 또 다시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비난하면서 대전 시내를 돌아다녔다.『한국일보』1960. 3. 9 조3면
시위가 모두 진압된 뒤에도 대전 시내 전 경찰은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시위학생을 색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 경찰은 오후 7시 30분 경 시위 주모자를 제외한 학생을 모두 석방했다며 사건을 표면상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주모학생 5명은 다음날 새벽 1시까지 “데모의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 “어느 당의 사주를 받은게 아닌가”, “공산당 스파이의 조종을 받았는지”등의 취조를 당하며 배후에 대해 추궁을 받았다.대전고등학교 60년사 편찬위원회,182-187쪽
한편 이날 오후 전장한 충남경찰국장은 형사상으로 학생들을 처벌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전고 학생 시위가 서울 모 계통의 지령 하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배후관계를 계속 추궁할 것이라고 밝혔다.『서울신문』도 충남경찰국장의 말을 인용해, 중앙의 모 계통에서 수 일 전 학생을 가장한 불량배 50여 명을 시내 각 학교에 잠입시켜 시위를 선동, 조종하였다고 보도하였다.『서울신문』1960. 3. 9 조3면
하지만 학생 측이 밝힌 시위 동기는 순전히 학원의 자유를 달라는 독자적인 운동에 불과하며 어떠한 배후관계도 없다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부당하게 구속되면 9일부터 동맹휴학을 감행하겠다고 언명하였다.『조선일보』1960. 3. 9 조3면 ;『동아일보』1960. 3. 9 조3면, 석3면 ; 안동 일·홍기범 공저, 73-81쪽 ; 조화영 편,『4월혁명투쟁사』, 국제출판사, 1960, 281-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