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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민주당원들의 ‘민주주의 장송’시가행진

선거수행의 참관을 포기한 민주당 광주시당부는 15일 낮 12시 50분 경안동일·홍기범 공저, 119쪽. 일부 기록은 낮 11시 45분으로(『동아일보』1960. 3. 16 조1면), 일부 기록은 12시 45분으로(『동아일보』1960. 3. 16 조3면),『조선일보』는 12시 55분 경으 로(『조선일보』1960. 3. 15 석3면), 반면『서울신문』은 오후 1시로 기록하고 있다(『서울신문』1960. 3. 16 조3면)., 70여 참관인과 100여 명의 민주당원『동아일보』1960. 3. 16 조3면. 일부 기록은 200여 명으로(『동아일보』 1960. 3. 16 조1면), 일부 기록은 약 50명으로(안동일·홍기범 공저, 119쪽), 반면 일부 기록은 3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서울신문』1960. 3. 16 조3면). 및 1천 여 명의 남녀시민 및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민주주의 장송 시가행진’을 했다. 민주당 전남 선거사무장 이필호 의원의 지프를 선두로 광주시 당 본부인 금남로 4가에서 출발하여 시위를 시작,“곡(哭)민주주의의 장송”이라고 쓴 만장을 들고 “민주주의는 절명하였다! ”, “우리의 자유를 찾자! ”고 외치며 도청으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YMCA 앞에서 무장경관 200여 명과 소방차의 출동으로 오후 1시 15분 경 충돌을 일으켰다. 이 충돌로 인하여 민주당 광주시당 선전부장 김녹영을 비롯해 염성웅, 조계현, 이정근, 양계식 등이 전치 2주일 이상의 부상을 입었다. 민주당 당원과 200여 명의 군중은 경찰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도청 앞까지 전진하였다. 그러나 1시 25분 경 소방차가 뿌리는 물로 인해 시위대가 민주당 선거사무소로 강제로 쫓겨 오면서 시위는 해산되었다. 이때 경찰은 이필호를 비롯하여 김석주, 염성웅, 오영 수 등 4명을 연행했다가 2시 10분 경 모두 석방하였다.
이 시위를 지휘하고 경찰에 연행되었던 민의원 의원은 “이번 선거는 경찰과 반공청년단으로 하여금 투표구를 포위하고 참관인을 구타 축출하고, 무더기표를 투입했으며 이의 신청을 요구해도 경찰이 선거위원장 명령 없이 참관인을 축출한 사실이 있다. 국민의 기본권 행사를 강도적 행위로 박탈하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늘로 살상 당했 다. 본 당부는 민주주의 장례식을 평화적으로 거행하는데 경찰과 소방대를 동원하여 구타 부상케 했으니 치안책임자를 추궁하겠거니와 국회가 개회되면 생명을 걸고 투쟁하겠다”고 호소하였다.
민주당 전남도당부에서는 이날 오후 5시 다음과 같은 ‘민주주의 장송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서울신문』1960. 3. 16 조3면 ;『조선일보』1960. 3. 15 석3면, 1960. 3. 16 조1·3면 ;『동아일보』1960. 3. 16 조1·3면 ;『경향신문』1960. 12. 23 석1 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19-120쪽
민주주의 장송 성명서 역사적인 3·15정·부통령선거는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절명케 한 날이다. 자유당과 자유당 정부는 선거운동을 가지각색으로 방해하였으며 선거기간 중 본 도내에서 사람이 두 명이나 피살되었고 4할은 사전투표, 4할은 공개투표 그것도 부족해서 각 투표소에서 참관인을 강제 추출하는 등 민주주의는 완전히 도살 절명되고 말았다.
우리는 울분을 품고 절명된 민주주의를 통곡하며 장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초당적인 애국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무장경관과 소방차를 동원하여 폭력, 물벼락으로 해산 저지하고 심지어 장송 행렬원을 구타 부상케 한 것은 천인공노의 준행인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시체 위에서 민주주의 소생을 위하여 불퇴전의 투쟁을 과감히 계속할 것을 이에 성명한다.
출처 : 『동아일보』1960. 3. 16 조1면
일련의 충돌 사태가 있었던 광주거리는 투표가 끝난 뒤에도 무장경관의 삼엄한 경비에 놓였다. 오후 2시 장송시위 뒤부터 민주당 광주시당부 부근에는 수 백 명의 시민들이 저녁 늦게까지 떠나지 않았다. 정·사복경관들은 시민의 통행을 제한하고 특별 감시를 계속하였다. 이날 밤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서석국민학교 주위와 경찰서 근방 에도 첩첩이 둘러싼 정사복 무장경찰대가 감시하고 있었다. 특히 개표장 옆에는 낮에 장송시위에 동원되었던 2대의 소방차가 다시 대기하고 있었다. 또한 심야에 이르기까지 광주 시내 거리의 순찰이 계속되었다.『동아일보』1960. 3. 16 석2면. 동아일보는 민주당 시당부를 비롯한 광주 시내의 무장경비 강화를 3월 15일 마산 사태에 따른 중앙으로부터의 특별 지시에 의한 것으로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