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를 교부받지 못하여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유권자들은 전국적으로 막대한 수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서울 시내에서도 동숭동, 명륜동, 전농동, 답십리동, 이태원동, 노량진동, 문래동 등 비교적 변두리 동네에서는 번호표가 유권자 수의 반밖에 배부되지 않아 유권자들과 통·반장 간에 시비가 벌어지는 사태가 빚어졌다. 번호표는 단순히 투표 진행 편의상 배부되는 것으로, 번호표가 없어도 유권자 명부에 등재된 유권자는 투표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번호표 없이는 투표소에 출입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서울 영등포 제106공군기지의 한 대대에서는 소속대원 400여 명 중 번호표는 19매밖에 나오지 않았고, 공군병원에서 치료 중인 100여 명의 환자에게는 단 1매의 번호표도 나오지 않았다. 광주에서는 번호표를 달라는 유권자를 때려 중태에 빠트리거나 선거가 끝나면 죽인다는 협박을 가하며 번호표를 주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부산 아미동 제2투표소에서는 한 유권자가 번호표를 달라고 요구하자 괴한 2명이 폭행했다. 전남 각 시군에서는 무더기 투표를 위해 대학생들과 노인 및 친 민주당계 인사의 번호표가 배부되지 않았으며 양동의 한 투표소에서는 한 여성유권자가 번호표를 달라고 요구하다 괴한에게 멱살을 잡혀 쫓겨났다. 부산 동구, 서구, 영도구 등 변두리 지역에서는 동회에서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유권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했다. 부산 전포2동 유권자 500여 명은 동회에 집결해서 번호표를 내놓으라고 항의하였으며 가야 1·2·3동 유권자 300여 명도 동회에서 번호표를 달라며 항의했다. 범전동 동회 앞에는 수 백 명의 유권자들이 번호표를 내놓으라며 농성을 하여 경찰이 출동해 제지했다. 전주 서학동에서는 경찰이 38명의 번호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민주당원이 발견하고 이를 압수하여 서학동 투표소 선거위원장에게 수령증을 받고 인계하기도 했다. 대구는 유권자의 약 30%가 번호표를 받지 못했다.
오후에는 각 동별마다 번호표를 받지 못한 수 십 명의 유권자에게 동사무소의 직원과 경찰이 협조하여 투표를 할 수 있도록 번호표를 나누어주었다. 농촌지역에서 3인조 투표가 성공리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유당 측에서 투표결과에 낙관하고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추측되었다.『부산일보』1960. 3. 15 석3면 ;『조선일보』1960. 3. 15 석1·3면, 1960. 3.16 조3면 ;『마산일보』1960. 3. 16 1면 ;『동아일보』1960. 3. 16 조1·3면, 석1·3면 ; 안동일·홍기범 공저, 131-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