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 발생

신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독재통치를 시작하던 1972년 10월 17일 당시 일본에 체류 중이었는데, 이후 해외에서 유신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그는 주로 미국에 머무르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였고, 또 다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 중이던 1973년 8월 8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자칭 ‘구국동맹’ 행동대원들(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었다.『경향신문』 1973.8.9. 1면; 『동아일보』 1973.8.9. 1면; 『조선일보』 1973.8.9. 1면; 『매일경제』 1973.8.9. 1면
괴한들은 납치한 김대중을 만 129시간(5일 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20분경 서울 동교동 자택 앞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납치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파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국정원진실위, 「김대중 납치 사건 진실규명」,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Ⅱ』, 2007, 430~571쪽
한편, 일본에서 납치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일본정부도 이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였다. 야마시다(山下) 일본 관방차관은 8일 오후 ‘한국의 전 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씨가 유숙하고 있던 그랜드팔레스호텔로부터 어떤 자에 의하여 연행된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김씨와 함께 있던 사람으로부터 경찰에 통보되어 김씨가 8일 오후 1시 조금 지나 호텔로부터 한국말을 사용하는 5명의 남자들에 의해 사라졌다. 범인이나 기타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 조사 중에 있으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작년 10월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된 후에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고 있으며 본국에서 대통령선거에 관련 되어 소추된 바 있어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듣고 있다. 일본에는 지난 달 상순부터 체류하고 있으며 관계자가 신변을 보호하고 있던 중 이 사건이 발생했다.”『경향신문』 1973.8.9. 1면; 『동아일보』 1973.8.9. 1면; 『조선일보』 1973.8.9. 1면; 『매일경제』 1973.8.9. 1면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당시 통일당 당수이던 양일동이 묶고 있던 그랜드팔레스호텔 2212호실에서 양일동 및 김경인과 함께 방을 나왔다. 그 순간 바로 옆 2210호실과 그 건너편 2215호실에서 괴한 5명이 뛰어나와 그중 3명은 김대중을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나머지 2명은 김경인을 양일동이 있던 2212호실로 끌고 들어갔다. 김대중을 덮친 괴한 1명은 마취약에 적신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코를 틀어막으며 2210호실로 들어갔고 괴한들은 그의 목을 짓누르며 두 손을 꺾어 로프로 묶으면서 유창한 한국말로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들은 호텔지하 주차장을 통해 승용차편으로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경찰은 특별수사반 설치, 비상사태 돌입했다.
8월 13일 밤 10시 20분경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귀환했으며 이후 기자회견을 갖고 피랍 5일간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구국동맹’ 행동대원을 자칭하는 5,6명의 청년들에게 납치돼 온몸이 묶인 채 자동차로 실려 모터보트로 큰 배에 이송되어 10여 시간을 항해한 후 11일 오후 한국 해안에 상륙해 초가집에 감금당했다가 13일 서울로 왔다. 8월 23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한국 정부기관이 김대중 사건에 관련됐다는 사실을 한국정부 소식통이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8월 24일 정부는 한국 정보기관의 김대중 납치사건 관련 보도 기사에 대한 취소 요구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을 폐쇄했다.
10월 26일 김대중은 연금이 풀리면서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와 같은 여건 아래서는 정치활동을 않겠으며 한일간의 우호에 금이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1월 1일 김용식 외무부장관은 ①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김동운 서기관은 그 직을 면하고 수사를 계속하며, ②김대중의 체일 중 한 언동에 대해 반국가적 언동을 재범치 않는다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 ③김총리가 방일 유감을 표명했다는 등의 내용의 김대중 사건에 관한 한일간의 종결조치를 발표했다. 1974년 12월 6일 김대중 납치 사건은 중앙정보부 소행이며 이후락에 책임을 물어 해임한 사실을 박대통령이 인정했다고 미국 언론이 보도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1983, 257~258쪽
이 사건으로 인해 유신체제에 대한 국제적 비난은 고조되었으며, 특히 자국의 주권이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일본과 외교적으로 상당한 마찰이 일어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도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정보정치 철폐”와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규명”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을 시발점으로 학생시위가 2년간의 침묵 상태를 깨고 분출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후 “유신 반대”를 외치는 학생시위는 고등학교까지 파급되었고, 언론계에서는 언론자유 수호 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1973년 말에는 재야 등 각계가 연합하여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연구소 편,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도서출판 선인, 2006, 244쪽
김대중 납치 사건은 2007년 국정원 과거사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진실위)가 「김대중 납치 사건 진실규명」 보고서를 발표,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게 되었다. 국정원진실위에 의하면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시에 따라 정보차장보 이철희가 지휘를 총괄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일공사 김재권(일명 김기완)은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있던 중정요원 김동운에게 공작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고,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이 계획안을 검토하였고,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 납치를 실행하였으며, 일등서기관 현춘이 현지 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육안으로도 드러나는 뚜렷한 지문을 남기는 등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러 일본경찰의 추적이 곧바로 가능했다.
한국 중앙정보부가 일본 땅에서 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낸 야당 정치지도자를 백주대낮에 납치해 살해하려 했던 이 사건으로 일본 주권침해 논란이 야기되었고 한일관계는 악화되었다. 이에 사건 발생 3개월 후인 11월 2일 김종필 총리는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담은 박정희 대통령 친서를 일본 다나카 수상에게 전달하였고, 다나카 수상 또한 납치사건에 대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답신을 전달하였다. 양국 정부가 합작해 김대중 납치사건을 둘러싼 진상을 은폐하기로 담합(한일 유착)함으로써 한일관계의 갈등도 봉합되었다.『반헌법행위자 열전 집중검토 대상자 명단발표 기자회견 자료집』(2017.2.16.), 141~142쪽; 국정원진실위, 「김대중 납치 사건 진실규명」,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Ⅱ』, 2007, 430~571쪽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에 의하면, 중정부장 이후락의 지시로 납치사건이 실행되었으며, 사건 발생 후 중정(정부)의 조직적인 진상 은폐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증언이 엇갈리는 가운데 직접적인 증거자료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당시 박정희 1인 중심의 초강경 권위주의체제에서 이후락 부장이 이철희의 반대에 부딪치자 ‘나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라고 역정을 낸 적이 있고, 김기완(김재권) 공사가 ‘박대통령의 결재를 확인하기 전에는 공작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버티다 곧 적극적으로 협조한 정황과 더불어, 납치공작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73.7.27. 김대중의 반유신 활동사항을 종합한 내용이 박대통령에게 직접 보고 되었을 때 공작진행과 관련한 상황도 포함되었을 개연성이 높으며, 박대통령이 사건 발생 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를 하였고, 김종필 총리를 파견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수습토록 한 점 등을 종합분석해 볼 때 박대통령의 직접지시 가능성과 더불어 최소한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결론지었다.국정원진실위, 「김대중 납치 사건 진실규명」,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Ⅱ』, 2007, 548~5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