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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문리대생 40여 명, 단식농성 3일째

대정부 요구사항 관철을 위해 단식농성 데모에 들어간 서울대 문리대생 20여 명은 사흘째인 1일 하오 3시 현재, 여전히 연좌데모를 벌이고 있다. 동교 교정에 있는 4월학생혁명기념탑 앞에서 가마니, 거적을 깔고 머리엔 흰 광목을 동여매고 이틀 밤을 새운 학생들은 31일 낮 12시 45분에는 단식 24시간 돌파를 기념하기 위해 ‘반민주요소 소각식’을 거행했다. 단식대원들은 4·19 탑 앞에서 일제히 기립해 길이 1미터, 폭 30센티가량의 백지에 ‘사찰, 폭력, 사형, 기만’, ‘통일대책 없는 무능’, ‘소영웅적 민주정치’, ‘조국 없는 매판자본’, ‘주체 잃은 외세의존’, ‘무르익는 일본 예속’, ‘불온문서 연구서적’, ‘단1년만 기다려라’ 등 8개 항목을 써서 노끈에 나란히 매달아 식장에 걸어 놓고 한 장씩 차례로 박수 속에 소각했다. 검은 안경을 쓴 황소와 매카시가 악수하는 그림을 불태웠다. 이 소각장면을 보기 위해 문리대 정문 앞과 4·19탑 주변에 약 200명의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이어 31일 밤동아일보에는 1일 상오 9시로 보도되었으나, 경향신문과 『6·3학생운동사』에 31일 밤으로 되어 있어 여기에 따랐다.(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108쪽, 269쪽)에는 ‘위대한 독재자’란 풍자극을 공연하고 박산군, 김완용을 등장시켜 썩은 쌀, 민족적 민주주의와 한일회담, 워커힐, 학생린치, 학원사찰 등을 비꼬았다.
1일 상오 11시에는 단식투쟁 중인 학생들과 이에 합세한 동교생 400여 명 등이 ‘국민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침입, 민생고 책임자 화장식’을 올려 정부에 대한 그들의 요구조건을 재확인했다. 이들은 “악덕재벌, 병든 황소, 사대주의, 민생고 책임자, YTP, 사쿠라 장학금, 교수구타, 최루탄,학원난입자→학원침입자” 등이 써진 허수아비 2개의 화장식을 했다. 이날 화장식에서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사회 4)은 “방향감각이 색안경에 가리어진 채 질주만을 계속하는 정권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정부이며 종착지는 그 어디인가”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낭독했으며, 이현대(정치 3)는 “그대여 병든 황소여, 우리 학도들은 낱낱이 그대들의 죄상을 고발한다. YTP의 학우 교살, 미행법은 누구를 위한 것이냐”라는 내용의 조사를 읽었다. 문리대 김지하(미학 4)는 “윤 문교장관이 고대 YTP를 장악, 고대를 비롯한 각 학교에 사쿠라 장학금을 뿌린 장본인이다”라고 폭로하여 학생들의 박수를 받았다. 하오 1시 30분쯤에는 노미혜(사학 4)를 비롯한 여학생 20여 명이 합세, 단식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단식농성에 대해 이 대학 여학생들이 물과 소금을 가져와 이들을 돌봐주었고, 4·19때 희생된 이근형의 어머니 이계단 여사는 기념탑 앞에서 땅을 치며 통곡, 학생들을 울먹거리게했다. 또한 린치사건으로 집에 누워있는 송철원도 격려 편지와 담배 10갑을 보내왔고, 여러 시민과 학부형들이 이들에게 각종 물품을 전달하였다. 학생들은 시민들이 보내온 사과, 꿀, 설탕,계란들을 극빈자에게 보내겠다고 기념탑 제단 앞에 올려놓았다.
이들은 사흘째에 기진맥진하여 누운 채 식을 올렸는데, 1일 새벽 이후 졸도자가 속출 7명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경향신문』 1964.6.1 석7면, 『동아일보』 1964.6.1 석7면. 단식농성은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직후 이 장례식의 조사를쓴 김영일(현재 김지하)이 생각한 것으로, 김영일은 당국에서 주모급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부가 될수 있었다. 학생회 주최의 ‘자유쟁취궐기대회’가 단식농성으로 연결된 것도 김영일이 손정박과 함께 김덕룡을 만나 공조문제를 구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처음 20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단식농성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여학생들, 상대와 의대, ROTC까지 합류하면서 6월 2일에는 200여 명으로 늘었다. 단식장의 상황은 교내방송뿐만 아니라 동아방송의 ‘앵무새’프로 등 대중전파 및 일간지를 통해서 매일 보도되었다.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단식농성, 투쟁가,화형식, 마당극 등의 운동문화는 한일협정반대투쟁의 대중화와 고양에 일조하였고, 이후 한국 민주화운동 속에 확산되어 뿌리를 내렸다.(6·3동지회, 『6·3학생운동사』, 역사비평사, 2001, 269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화운동사 1』, 돌베개,2008, 424~4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