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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장소는 쉿!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1987년 5월 27일 새벽, 향린교회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근처 파고다 공원 앞과 인사동 골목길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없이 쪽지를 건네고 사라지는 청년들이 있었다. 같은 시각 명동성당, 성공회 대성당, 종로5가의 기독교회관에는 전투경찰들이 건물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곳들은 재야단체들이 집회나 농성장소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경찰이나 안기부가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7시 전후로 향린교회로 모여든 이들은 150여 명이었다. 모두 담당형사가 따라다니는 감시대상자들이었다. 이들이 하나같이 형사의 미행을  따돌리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발기인대회장소인 향린교회에 무사히 도착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대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발기인대회의 날짜와 시간은 정해 놓고 장소는 미정으로 두고 당일 새벽에 전령들이 전하기로 계획한 때문이었다. 쪽지를 건네고 사라진 청년들은 대회장소를 알린 전령들이었다. 경찰들이 향린교회에 뒤늦게 들이닥친 것은 대회가 이미 끝나갈 무렵이었다. 대회를 준비한 실무자들이 국본 결성 사실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에 전화를 한 직후, 경찰은 그제야 알고는 기자보다 먼저 나타났다.

발기인 대회는 매우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민통련 의장인 문익환 목사가 구속중이었으므로 계훈제 선생의 의장 대행으로 진행되었다. 발기취지문 낭독과 채택이 있은 뒤 곧바로 결성대회에 들어갔다. 결성대회는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내일을 보장할 수 없었다. <민주헌법 쟁취하여 민주정부 수립하자>는 결성 선언문 낭독으로 대회는 무사히 끝났다.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게 되는 6.10민주항쟁을 이끄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국본은 재야와 종교세력 뿐만 아니라 야당까지 망라한 연합조직으로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담당했다.

국본은 우선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 쟁취’라는 최소한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대회직후 상임집행위원들은 회의를 열어 6월 10에 국민들이 참여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날 국본의 결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국본을 책임지는 대표자들로 하여금 공식 국민대회 출정식을 가지도록 했다. 공식적인 선언대회를 가지지 못해 통합적 조직력을 가질 수 없었던 1919년 기미독립선언의 역사적 교훈 때문이었다. 6.10국민대회 출정식은 전두환 정권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는 학생, 시민을 잡아가려 한다면 “국본 대표들부터 먼저 잡아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6.10대회를 알리는 전단지가 대회 이틀 전부터 거리에서 호외신문처럼 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