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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숄을 아세요?

1976년 3월 1일 오후6시,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열렸다. 전국에서 올라온 20여 명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했고, 2천여 명의 신·구 교회 인사와  신자들이 참석했다. 1부에서 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강론을 하고, 2부에서는 개신교의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맡았다. 이우정 교수가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선언문 “민주구국선언”을 낭독했다. 그리고 3.1절 기념미사는 별일 없이 조용히 끝났다.

3월 10일, 갑자기 이 미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 검찰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이 발생하여 관련자 20명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입건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검찰은 이에 대해 문익환 목사 등 11명을 구속하고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사건’(3.1구국선언)이라는 긴 이름을 붙였다.

재판이 시작되자 3.1구국선언 서명자 가족들에게 가족용 방청권이 나왔다. 방청권을 가지고 간다는 것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비공개 재판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은 분노하여 방청권을 던져버리고 총 14번의 재판을 모두 거부했다.


가족들은 재판을 받고 있는 구속자들을 법정 밖에서 지원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 고난을 상징하는 보라색 한복을 입고 시위를 했다. 어떤 날은 보라색 십자가가 달린 원피스를 입었고, 선명한 보라색 글자 ‘민주회복’을 써넣은 부채를 펴는 퍼포먼스를 했다. 그렇게 보라색은 3.1가족의 상징이 되어갔다.

 수감자들에게는 더더욱 겨울나기가 혹독했던 시절이었다. 구속자가족들은 털실로 짠 따뜻한 양말과 옷가지를 감옥에 들여보냈다. 그래서 가족들은 모이기만 하면 성명서를 쓸 때에도 농성을 할 때에도 면회순번을 기다릴 때에도 뜨개질을 했다. 점차 뜨개질도 투쟁이 되어갔다.

빅토리숄을 짜는 것도 투쟁이 되었다. 빅토리숄은 보라색 실로 1코에 기둥을 4개씩 세워 짰다. 4개의 기둥은 ‘민주회복’ 네 글자를 상징했다. 보라색은 사순절에 쓰이는 색깔이었고  무궁화를 상징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뜨개질을 할 때 ‘민-주-회-복’을 한 음절씩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구속자 아내들은 남편들의 곤경을 생각하며 울기보다는 오히려 뜨개질을 하는 동안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을 불어 넣으며 더욱 결의를 다져나갔다.


구속자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여성연합회 기장여신도회 회원들까지 뜨개질에 참여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빅토리숄은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팔려나갔다.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민주화운동을 지원을 하고 있던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 회원들이 해외에도 팔 것을 제안했다. 미국 군사우편을 이용할 수 있었던 그들은 해외 운반책의 역할까지 맡아주었다. 

빅토리숄이 해외에까지 나가 잘 팔리게 되자 박정희 정권은 구속자 가족들이 보라색실을 구하지 못하게 하려고 뜨개실 상인들에게 보라색 실을 팔지 못하게 했다. 조사관을 시장에 보내 판매 감시를 했다. 그러나 실가게 주인들은 조사관들이 지나갈 때는 실을 감추었다가 실을 사러오는 아내들에게 몰래 팔았다. 숄 판매로 조성된 기금은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거나 면회할 사람들이 없는 구속자들을 돌보는데 사용되었다. 

구속된 인사들이 법정에서 유신정권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을 때, 가족들은 법정 밖에서 민주회복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보랏빛 퍼포먼스를 하며 유신에 맞서고 있었다.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리라는 염원을 담은 빅토리숄은 민가협 어머니들의 보라색 머릿수건으로 여전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