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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김대중의 편지

1976년 3월 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10명의 서명으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 위반죄를 적용하여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구국선언 관련자들을 구속시켰다. 김대중은 1976년 3월 8일 새벽에 강제 연행되어 서대문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가 1심에서 8년(구형 10년), 항소심에서 5년(구형 10년)을 선고 받았고, 1977년 3월 22일 징역 5년을 확정 받아 4월 14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된다.

아래 다섯 편의 편지 중 앞의 세 편지는 김대중이 진주교도소 수감 중에 쓴 편지이다. 나머지 두 편은 1980년 9월 17일,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육군교도소에서 쓴 편지이다. 이때의 사형 선고는 그의 인생에 찾아 온 다섯 번째의 죽을 고비였다.  김대중은 유언을 남기는 심정으로 아내 이희호와 가족에게 편지를 썼다. 아래 옮긴 것은 정치인 김대중이 아닌 '선생님' 김대중도 아닌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 염려, 고마움, 미안함 등을 표현한 내용에서 발췌했다.  

수신인이 부인 이희호로 되어 있지만 가족 각각에게 쓴 편지도 있고 여러 사람에게 함께 보내는 것도 있다.  수감중 한정된 지면에 쓴 편지들이라 깨알은 글씨로 메워졌다.

삼남 홍걸에게 쓴 편지가 많이 인용되었다. 1977년에 쓴 세 편이 홍걸에게 쓴 편지이다. 이때 홍걸은 중학교 1학년 정도된 듯하다. 아직 어린 막내가 가장 애틋하고 보고싶은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진다. 홍걸의 중간고사 결과가 좋길 바란다는 내용, TV를 생각없이 많이 볼 것에 대한 우려, 이웃사랑이란 무엇인지, 이웃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 것인지, 인격적으로 친구를 대할 것 등에 대해 중학생의 눈높이에서 조언하고 있다. 어린 아들을 곁에 앉혀두고 두런두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여느 아버지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남(二男) 홍업에게 쓴 편지는 자신 때문에 홍업이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버지의 아프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며느리인 장남 홍일의 아내 윤혜라에게는 남편의 진정한 동반자가 되는 길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 남편의 일에 협조자가 되어야 하고, 때로는 남편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현명한 아내될 것을 주문했다. 

1977.5.9. 아들 홍걸에게 쓴 편지

사랑하는 홍걸아! 너의 편지는 언제나 반가히 받아보았다. 아빠는 너희들의 편지받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다. 더구나 네가 학교성적도 좋아지고 체육도 잘 되어간다니 참 기쁘다. 무엇보다도 좋은 친구가 많이 생기고 선생님들에게도 호감을 느끼면서 재미있게 공부한다니 더 바랄 것이 없구나. 친구들에게는 되도록 친절하고 관대하며 그의 인격을 나의 인격같이 존중해주어야 한다. 내가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으려면 먼저 나부터 남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꼭 명심할 것은  아무리 친구를 애낀다하드래도(아낀다하더라도)  그의 주장이나 행동이 너의 판단에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을 때, 그리고 그것이 너무도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도저히 그대로 넘길 수 없을 때는 결코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된다. 그런 사람은 자주성과 신념이 없는 사람이며 결코 장래 자기 앞을 성공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특별히 큰 차별이 없는 한 되도록 친구의 의사를 존중해 주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많은 벗들과 원만히 살아나가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다. 

(중략)

"정신력을 기르는 책"을 잊지 말고 되푸리(되풀이)해서 읽어라. 꼭 필요한 일이다. 중간고사를 친다는데 성적이 더욱 좋아지길 바란다. 몸 건강하여라. 아버지

1977.9.22. 홍걸에게 쓴 편지

사랑하는 홍걸아! 네가 최근 보낸 그림 엽서와 편지엽서 그리고 쿼봐듸스(쿠오바디스) 감상문 아주 기쁘게 받아보았다. 네가 언제나 아버지 위해 기도해준 것을 나는 얼마나 기쁘게 생각한지 몰은다(모른다). 이번 쿼봐듸스의 감상문은 아주 잘 썼다고 행각한다. 그와 같이 책을 읽으면 꼭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있어야만 책 읽은 가치가 있다. 책은 죽은 지식을 얻기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느끼고 깨닫기 위해 읽는 것이다. 지난 1학기 통신부 보고 아버지는 약간 실망했다. 너는 하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이니 이번에는 특별히 노력해라. (중략)

그리고 만일 요즘도 텔레비전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지 몰으겠다(모르겠다).  야구중계마다 보고 연속극 빼지 않고 보고 하지 않는지. (중략)

그리고 쿼봐듸스, 대위의 딸, 백범일지 등 TV푸로(프로) 못지 않게 자미(재미)있고 유익하지 않느냐? 나도 하로(하루)도 빼지 않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네가 건강하고 착하고 공부 잘 하게 자라서 장래 우리나라와 세계를 위해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인물이 되어주기를 아버지가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몰은다(모른다). 너는 반듯이(반드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인물이 될 것을 믿는다.

1977년 이희호와 홍걸 등에게 쓴 편지


사랑하는 홍걸아! 기쁜 성탄절에 하느님게(께)서 네게 많은 복을 내려주셨으리라 믿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웃이란 바로 옆에 있는 어머니, 형들, 지영이, 비서 아저씨, 부억(엌)아줌마, 네가 타는 뻐스 차장, 학교 선생님, 친구 그리고 길거리서 부디치는 사람이다. 이웃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다. 네가 남에게 바라는대로 그에게 해주어라고. 네가 바라는 것, 예를 들면 네가 어머니라면 어머니가 피곤할 때 홍걸이가 어깨라도 주물러주면 참 행복하겠지? 네가 형수라면 네 용돈에서 지영이 노리개 하나쯤 사주면 참 기뻐하겠지? 네가 부엌 아줌마라면 과일 먹고 식기를 부엌까지 가져다 주면 고맙겠지? 네가 너의 학우라면 네가 잘 했을 때 와서 칭찬해 주고 네가 선생으로부터 꾸중들었을 때 가락국수라도 한 그릇 사주면서 위로해 주면 좋겠지? 이런 것이 이웃사랑이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것이 두가지 있다. (이웃에) 대해서 아무리 형식적 물질적으로 잘해주어도 네 마음 속에 그를 사랑치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또 이웃사랑하면서 그가 고맙게 생각하고 보답(해주기를 바)라면 소용없다.

1980.11.24. 홍업에게 쓴 편지

나는 너를 생각할 때마다 언제나 죄책감에 가까운 부담을 느낀다. 너는 만 30세가 넘도록 아버지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두 번이나 결혼의 길을 잃었으며 경제계에서 일해보고자 하면서도 직장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된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너의 행복과 전정을 가로막는 결과만 빚어내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더욱히(더욱이) 네가 그런 것을 조곰도(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을 볼 때 나의 심정은 더욱 괴로우며 오직 하느님게(께) 너의  장래행복을 기구드릴 뿐이며 지금까지의 쓰라린  체험들이 너를 위해서서는 황금보다도 더 귀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자식이라고 차별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나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너도 잘 알 것이다. 아버지는 네가 아버지 옆자리에 타고 차를 달릴 때마다 느낀 기쁘고 사랑스런 인정을 지금도 회상한다.

1980.12.19. 며느리 윤혜라(장남 홍일의 아내)에게 쓴 편지

내가 너에게 특히 바라는 것은 너는 지금과 같은 견실하고 겸손한 자세를 그대로 가추면서(갖추면서) 네 남편의 발전을 위해 좋은 협조자가 되어 주어라. 앞에 지적한 점을 참고하면서 언제나 남편과 같이 있는 심정으로 그가 하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남편의 가장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자는 가정에만 있으니 자칫하면 세상일에 어두워진다. 그러므로 의식적으로 남편의 일의 분야에 관한 신문 참고서적 세론 등에 관심을 갖어야(가져야) 한다. 항시 남편을 위해 조언할 일이 없는지 생각하는 습성을 드려야(들여야) 한다. 

가장 현명한 아내는 남편의 일에 완전한 지식과 판단을 가지면서 이를 남편에게 강요하지 않고 남편 스스로가 자기 능력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암시하고 겸손하게 조언하되 언제나 그 최후 결정은 남편이 내리는 형식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 지면상 그 외 몇가지를 간단히 적는다. 아내는 남편이 양심과 도덕에 어긋난 일을 하거나 비겁한 처신을 하려할 때는 이별을 각오하고라도 이를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그런 아내는 남편의 존경을 받게 된다.

아내는 언제나 자기 연령에 상응한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내면 생활의 진선미와 더부러(더불어) 사치 아닌 깨끗하고 자기 개성에 맞는 몸단장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남편을 자기 옆에 기쁜 마음으로 있게 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