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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원, 의문사 제1호의 죽음을 기록하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 했다. 울던 아이도 ‘남산’이라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했다.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빼고는 모든 게 가능했다는 중앙정보부. 독재에 반대하던 민주화운동 인사뿐만 아니라 정치인, 유학생, 막걸리 한 잔에 어설픈 욕 한마디 던진 서민, 물고기 잡는 것 밖에 모르던 어부도 ‘남산’을 거치면 혹독한 고문과 조작에 빨갱이가 되고 간첩이 되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산’에서 빨갱이로 만들어졌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조직사건의 구성원이 되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죽어서 그 곳을 떠났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남산’ 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기에, 사료관이 소장하고 있는 사료 중에도 중앙정보부와 그 후신인 안기부의 혹독한 고문과 조작사건, 의문사를 고발하는 사료들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 중에 특히 눈에 띄는 사료가 하나 있다. 전 중앙정보부원 최종선 님이 기증해주신 육필 기록, 우리나라 의문사 제1호라고 얘기하는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를 밝히는 비망록이다. 최종길은 최종선의 형이다.

1973년 10월 2일, 유신체제에 항의하는 첫 시위가 서울대에서 일어났다. 대학가의 시위는 일파만파 번져갔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구속, 연행에 당시 법대의 학생과장이었던 최종길 교수는 교수회의에서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월 16일,  최종선은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 수사에 필요하니까 형의 협조를 바란다'는 중앙정보부 간부의 얘기에, 국가에 협조하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며 형 최종길 교수를 그의 직장 중앙정보부로 직접 모시고 갔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는 3일 만에 차가운 시신으로 변했고, 간첩이 되었다.

최종선은 삼엄한 통제와 감시 속에서 형의 장례를 치른 후, 중앙정보부에 휴가를 내고 의사인 고교 동창에게 부탁하여 세브란스 병원의 정신병동에 입원했다. 그는 대학노트 한 권을 얻어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출두하는 날부터 죽는 날까지의 모든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정신병원은 이 비밀스럽고 위험한 기록을 작성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최종선은 정신병동에서 1주일을 보내면서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과 기억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겼다. 목숨을 건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이후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어느 수녀의 손을 통해 깊은 수녀원에 은밀하게 숨겨졌다.

최종길 교수의 죽음을 밝히려는 노력은 철저히 차단되었다. 그의 동료들은 협박과 공포 분위기로 침묵을 강요당했으며, 미국에 있는 동료들조차 중앙정보부의 방해로 그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종길 교수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신문 보도보다 더 빨리 더 넓게 세상에 알려졌다. 

1974년 10월 26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는 ‘정의와 평화, 조국을 위해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고 있는 이를 위한 기도회’ 강론에서 최종길 교수의 사인 규명을 요구했다. 12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는 ‘인권회복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위한 추도미사’에서 ‘최종길 교수와 인권회복을 위해 떠난 모든 형제들을 추모하는 추도사’를 통해 최종길 교수의 죽음을 전기고문에 의한 타살로 규정했다.


1980년 서울의 봄, 서울대에서 최종길 교수의 사인규명과 진상공개 요구가 일어났다. 그들이 용공으로 조작되어 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최종선은 자신이 기록한 비망록을 공개하기로 결심하고 <양심선언>을 작성했다. 그러나 곧 이어 일어난 광주의 비극과 전두환 정권의 등장으로 비망록은 공개될 수 없었다. 

비망록은 이후로도 계속 깊은 수녀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며 숨어 다녀야 했고, 1988년 10월 <평화신문>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2002년 5월 27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 교수 사건에 대하여 "사망 경위를 중앙정보부가 조직적으로 은폐 조작했고, 중앙정보부가 유족을 찾아가 3,000만 원의 보상금 등을 제안하며 가족을 회유하기도 했다."면서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인하여 사망"한 최종길 교수를 민주화운동가로 인정했다. 한 달 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혔고, 같은 날 유족은 국가와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06년 2월 14일 서울고등법원은 국가가 유족에게 18억48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고, 법무부는 상고를 포기했다.

2003년, 최종선 님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을 기록한 비망록 원본을 사료관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