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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 갤러리
이런 꿈은 어떻겠오?/ 그 무덤 앞에서 샘이 솟아/ 서해 바다로 서해 바다로 흐르면서
휴전선 원시림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만주로 펼쳐지고/ 한려수도를 건너뛰어 제주도까지 뻗는 꿈,
그리고 우리 모두/ 짐승이 되어 산과 들을 뛰노는 꿈,/ 새가 되어 신나게 하늘을 나는 꿈,
물고기가 되어 펄떡펄떡 뛰며 강과 바다를 누비는,/ 어처구니없는 꿈 말이외다
- 문익환 목사의 시 '꿈을 비는 마음' 중에서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월 명동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1978년 10월 다시 구속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문익환 목사가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9호의 해제와 함께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문익환 목사가 노모 김신묵 여사(좌)와 부인 박용길 장로(우)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재일교포유학생학원간첩단사건으로 구속수감되었다가 출소한 이철과 그를 13년 동안이나 옥바라지를 한 민향숙의 결혼식(1988.10.28.)에 참석한 문익환 목사가 신부의 어머니와 춤을 추며 기쁨을 표현하고 있다.
1990년 12월 7일과 8일 이틀 동안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민가협과 세종대학교 총학생회 공동주최로 열린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서 문익환 목사가 시 낭송을 하고 있다. 그리고 안치환의 노래 '마른 잎 다시 살아나'를 불러 자리를 한층 빛냈다.
문익환 목사가 방북 일정(1989.3.24.~4.3.)을 마친 뒤 베이징, 도쿄를 거쳐 4월 13일에 귀국했다. 통일을 향한 염원은 그를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이르게 했다. 방북 후에는 김포공항에서 연행되어 바로 구속되었다. 그는 방북에 대한 순수한 동기나 목적보다는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수감되어 19개월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문익환 목사가 법정에 섰을 때, 두 손이 밧줄에 묶인 채 사진기자들에게 보여주었던 소년 같은 미소는 그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흉악범처럼 묶여 있던 처지와 미묘한 부조화를 이루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1990년 12월 6일~8일 중앙대 용산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고 김병곤의 빈소에 조문을 온 문익환 목사와 리영희 선생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병곤은 서울대 재학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이래 각종 시국사건으로 6번이나 투옥되는 등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청년운동가이다.
두루마기 차림의 문익환 목사.(1918.6.1.~1994.1.18.) 오픈아카이브에서 사진으로 확인되는 그의 두루마기는 검정색, 흰색, 약간의 회색빛이 도는 남색이 있다. 박물사료로 사료관에 소장 중인 검정색 모직 두루마기에는 짧은 토끼털 목도리가 앙증맞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