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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와 민간인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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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며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민주화운동 인사들에게도 피하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남산, 남영동, 서빙고, 송파로 불렸던 곳이다.

중앙정보부(안기부), 치안본부, 보안사(기무사)의 대공분실. 이곳에서 민주화운동 인사뿐만 아니라 정권의 눈에 거슬리거나 정권유지를 위한 먹잇감이 된 사회각계인사들과 일반 서민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좌익사범이나 간첩으로 둔갑하곤 했다. 일반 경찰서에서도 고문은 일상적으로 행해졌지만, 이 네 곳의 고문은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중 “서빙고호텔”로도 불렸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의 고문은 가장 무지막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국방부 직할부대로서 군사에 관한 정보수집 및 수사를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이런 군 수사정보기관이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정권유지를 위한 각종 공작과 수사와 고문으로 조작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1979년 10.26사건 이후 보안사는 전두환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있으면서 12.12쿠데타를 일으키고, 1980년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 등에 관여하며 정권을 장악하는데 전위대 역할을 했다.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대량해직을 비롯하여 8천여 명에 이르는 공직자 해직과 삼청교육대사건, 김대중·김영삼을 포함한 835명에 대한 정치활동 금지조치, 8명의 강제징집 대학생을 사망케한 녹화사업, 이밖에 각종 정치공작과 정계 언론 학원 종교계에 대한 사찰, 강제연행 등 갖가지 형태의 인권탄압 등이 보안사의 직간접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졌다. 전두환 정권 시절, 보안사는 국민 위에 군림하면서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민간인 사찰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1990년 10월 4일, 보안사 대공처 수사3과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보안사가 민간인을 사찰했다.”고 폭로했다. 윤석양은 보안사 탈영 시에 가지고 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4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에 대한 개인신상카드, 개인별 동향파악 내용이 들어있는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을 공개했다. 민간인 사찰은 평민당 김대중 총재, 민자당 김영삼 대표, 김수환 추기경 등 정계ㆍ종교계ㆍ학계ㆍ노동계ㆍ재야 등 각계각층을 망라하고 있었다.

윤석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어과 8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4학년 2학기에 제적되자 1990년 5월 1일에 군에 자진입대했다. 육군 이병으로 전방에 배치되었던 그는 1990년 7월 3일 학생운동 전력이 문제가 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혁노맹)과 관련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보안사의 협박과 프락치 활동 강요에 윤석양은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담당했고, 1990년 8월 22일 보안사는 현역군인 10명이 포함된 혁노맹사건을 발표했다. 1990년 9월 24일, 윤석양은  보안사 자료들을 가지고 서빙고 분실을 탈출하여 노태우 정권의 민간인 사찰을 세상에 공개했다.

개인사찰은 꼼꼼하고 광범위했다. 보안사는 감시자별로 담당관을 두고 A, B, C, D 네 등급으로 분류하여 관리를 하고 있었다. 개인신상카드에는 개인고유번호를 붙인 동향파악 대상자의 인적사항, 가족사항, 해외여행 관계, 교우 및 배후 인물 등 9개 항목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신체특이점'에는 키와 몸무게, 체형, 머리형태와 색깔, 수염 정도, 얼굴형태, 안경 착용 여부 등이 기록되었다. '주거환경'에는 가옥형태, 가옥 내부구조, 담장의 형태와 높이, 출입문과 비상 탈출구, 예상도주로와 은신처도 들어있었다. 또한 각종 집회와 모임에서의 발언내용, 접촉인물, 저술서적, 신문잡지 등에 기고한 칼럼 등 주요 활동 내용 등을 세밀히 수집해 관리하고 있었다.

또 정계, 노동계, 종교계 등 사회 전반에 프락치 조직까지 두고 있었다. 사찰대상자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잡지사를 만들어 보안사 요원들을 취재기자로 위장했으며, 서울대 주변의 정보수집을 위해 신림동에 위장술집도 운영하고 있었다. 장교는 지배인으로, 사병은 웨이터로 위장했다.

개인카드는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개인고유번호> 294번 문동환 목사(당시 평민당 부총재)의 경우 <신체특이점>란에 '안경착용, 반백머리에 순하게 생김, 말씨를 미국교포 같이 더듬거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담 형태와 높이는 '시멘트담 1.5m'로 적혀있으며, <주변상황>은 '가옥 우측 및 뒷면이 산으로 돼있으며 좌측은 도로에 연결되는 상가지역'으로 기록돼있고 가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출입구는 유치원 정문과 함께 사용하며 비상구는 없음'으로 되어있으며 <예상은신처>는 '김대중家'로 기록되어 있었다.

<개인고유번호> 295번 노무현 전 대통령(당시 국회의원)의 경우 '순화대상 A급'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월별동향보고서>의 <분석의견란>에는 '노동문제와 관련해 반정부적인 과격한 언동으로 노동자를 선동하고 있으므로 지속적인 동향관찰 요망됨'(1989년 9월 1일)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문과 월간지 등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 기사들의 복사본이 주요내용에 붉은색 밑줄을 그어 첨부되어 있었다.

민간인 사찰 대상자 대부분이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인사들이었다. 민간인 사찰 개인카드 명단이 공개되자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서는 명단에 이름이 빠진 사람에게 “민주화운동 열심히 안했나 보지?” 라며 짓궂게 놀려대는 농담이 오가기도 했다.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들에게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은 이미 알고 있고 당하고 있던 현실이었다. 진저리쳐지는 사찰과 고문의 현실이 이제 물증으로 확인되었다.

윤석양의 폭로는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폭로 직후 국방장관과 보안사령관이 경질되었고, ‘공포의 고문실’로 악명 높았던 서빙고동 보안사 분실(서빙고 대공분실)은 폐쇄되었다. 보안사는 또 “뼈를 깎는 심정으로 새로 태어나겠다”며 12월 26일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로 명칭을 바꿨다. 그러나 군의 민간인 사찰은 기무사에 의해 계속되었다.

현역군인의 위치에서 양심선언을 했던 윤석양은 2년 가까이 도피생활을 했으나, 1992년 9월 23일에 체포되어 육군고등군법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사찰대상자였던 노무현, 한승헌, 김승훈, 문동환 등 각계의 주요인사 148명은 1991년 6월 27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고, 1998년 7월 24일 대법원은 보안사가 헌법상의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점을 인정하여 국가는 원고들에게 각각 200만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 판결했다. 

2004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위위원회는 혁노맹사건 연루자 24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