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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 낭독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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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무엇을 망설이고 무엇을 생각할 여유가 있단 말인가! 대학은 휴강의 노예가 되고 교수들은 정부의 대변자가 되어가고 어미닭을 잃은 우리들은 반응 없는 울부짖음만 토하고 있다. (중략) 우리를 대변한 동지들은 차가운 세면바닥 위에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중략)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후략)"

1975년은 유신헌법 선포 이후 유신철폐, 민주회복 국민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펼쳐진 해였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에서 3차 시국성토대회가 열렸다. 대회 전날 농대생 김상진은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과 '양심선언'을 작성하였다. 시국성토대회의 세 번째 연사로 나온 김상진은 유신의 위법성과 독재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읽던 중 칼로 자신의 왼쪽 복부를 찔렀다.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다음날 서울대병으로 이송 중 앰뷸런스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상진의 나이 만 25세였다. 유신이라는 시대 상황에서 청년은 죽음으로 폭압에 항거하며 이 나라 민주주의 제단에 피를 뿌렸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서둘러 화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서울대생 1,000여명은 5월 22일 ‘김상진 열사 장례식’을 거행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오둘둘사건’으로도 불리는 열사의 장례식은 긴급조치9호 선포 이후  일어난 첫 번째 유신반대 시위이다. 

김상진 열사의 육성 녹음본은 월간 『말』의 대표를 역임한 정혁기 선생이 기증하였다. (200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