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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공조작사건의 이름들 - 림(林)
1980년 전두환 정부가 출범한 직후,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이른바 공안사건들이 잇달아 발표되었다. 무림사건(1980. 12.), 학림사건(1981. 5.), 아람회 사건(1981. 7.), 부림사건(1981. 9.), 횃불회사건(1982. 3.), 오송회사건(1982. 11.) 등이 대표적이다. 무림사건과 학림사건은 서울을, 아람회사건은 대전·충남을, 부림사건은 부산을, 횃불회사건은 광주·전남을, 오송회사건은 전북을 각각 배경으로 했다. 민주화운동과 민주세력을 말살하려는 전두환 정권은 전국적으로 용공조작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가혹한 고문과 불법수사로 만들어진 조직사건은 그들에 의해 이름이 만들어졌다. 서울과 부산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사건에는 모두 '림(林)'자가 붙었다. '림(林)'이란 조직사건을 뜻하는 경찰 내부의 용어였다.
무림사건
12.12군사쿠데타 1주년을 하루 앞둔 1980년 12월 11일, 서울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데모가 벌어졌다. 그리고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이라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이어 데모 주동자들에 대한 혹독한 고문과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좌경 유인물 사건에서 서울대 학생운동 전체 조직사건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연행자 250명 가운데 80여 명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고 9명이 구속됐다. 전두환 정권 출범 직전의 대규모 공안사건이다.
경찰은 이 사건을 ‘무림(霧林)’이라고 이름지었다. ‘림(林)’이란 조직사건을 뜻하는 경찰 내부의 용어였고 ‘무(霧)’는 안개로, 안개 속에 있던 서울대 학생운동 조직이라는 뜻이었다. 고문경관으로 악명 높은 이근안이 <반파쇼학우투쟁선언>을 썼다고 자백한 학생에게 "너희 사건을 '무림'이라고 짓겠다. 안개 무(霧)자, 수풀 림(林), 멋있지?"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한다.
학림사건
1981년 2월27일 결성된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은 1981년 봄부터 대학가의 시위들을 주도했다. 무림사건으로 학생운동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생각했던 전두환 정권은 연이은 학원가의 시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에서 3월19일 첫 시위가 발생한 이래 5월 중순까지 성균관대·부산대·동국대 등에서 모두 8차례의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5월 27일 서울대 시위 도중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며 도서관 6층에서 투신자살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81년 6월부터 경찰은 전민학련 관계자 400여 명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 관련자 300여 명을 연행했고, 19일에서 길게는 78일까지의 불법 구금과 혹독한 고문 끝에 25명이 구속됐다.
'학림사건'이라는 말은 전민학련이 첫 모임을 가진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경찰이 숲(林)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는 뜻으로 붙였다고도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는 가운데 혹독한 고문으로 만들어진 이 사건을 통해 치안본부의 한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이근안이라는 사실은 김근태 고문사건이 일어난 후였다.
부림사건
'부산의 학림사건'이라는 뜻의 명칭이다. 전두환 정권 출범 초기인 1981년 9월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인 최병국 검사의 지휘 하에 부산지역 양서협동조합을 통해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20일에서 최대 63일 동안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구속한 사건이다. 공산주의자라는 허위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말을 듣지 않으면 바닷물에 집어넣겠다.”라는 협박과 구타, 온갖 고문이 가해졌다. 독서모임이나 몇몇이 다방에 앉아서 나눈 이야기들이 정부 전복을 꾀하는 반국가단체의 '이적 표현물 학습'과 '반국가단체 찬양 및 고무'로 날조되었고, 우연한 선후배의 만남이나 졸업축하회, 망년회, 이사 간 친구집에 놀러간 것까지도 사회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집회로 규정했다. 변론은 당시 부산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광일, 문재인, 노무현 등이 무료로 맡았다. 특히 이 사건은 노무현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됐다.
‘부림’이란 용어는 1980년 12월에 있었던 ‘무림사건’, 1981년 5월의 ‘학림사건’ 등 ‘림’자 돌림에 맞춰 부산지역의 ‘림’, 즉 ‘부림사건’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