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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공조작사건의 이름들 - 회(會)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 초반, 전국 각지에서 용공조작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에 의해 투옥되었다. 무림사건(1980.12.), 학림사건(1981.5.), 부림사건(1981.9.) 등 소위 조직사건을 의미하는 “림(林)”자 돌림 외에도, “회(會)”자 돌림 용공조작사건이 발생하였다.
대전·충남의 한울회사건(1981.3.), 아람회사건(1981.7.), 금강회사건(1981.7.)과 전남·광주의 횃불회사건(1982.3.), 전북의 오송회사건(1982.11.) 등이다. 일상적인 친목모임, 계모임, 성서모임, 돌잔치 모임, 교사들의 4.19추모모임 등이 불법수사와 폭력, 가혹한 고문을 통해 조직사건으로 변모되었다. 이른바 빨갱이 조직사건을 만든 사람에게는 일계급 특진 등의 특전이 주어졌고, 검찰과 법원은 이를 방조하거나 확인해주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강도 높은 폭력과 고문으로 단명하거나 오랜 기간 고통에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고, 생존자들은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람회사건
1970년대 유신이 한창 기승을 부릴 무렵, 충남 금산고등학교 몇몇 학생들과 이웃 학교 선생님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고향을 오갈 때나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계속 정을 나누었고 시국에 관한 정보도 교환하였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에는 광주의 실상을 알리는 성명서를 돌려보기도 했다. 1981년 7월 대전경찰서는 이들이 아람회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충청남도 금산 지역에 배포했다는 혐의로 관련자 10명을 연행했다. 이들은 고문 등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자백을 강요받았고, 사법부는 이들에게 징역 1년 6월부터 10년을 선고했다.
아람회라는 용어는 친목모임의 회원 딸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1981년 5월 17일 대전에서는 친목모임 회원의 딸 '아람'의 백일잔치가 열렸었다. 공안당국은 여기서 피의자들이 소위 '아람회'라고 불리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는 혐의를 참가자들에게 뒤집어씌웠다. 백일잔치의 주인공 ‘아람’은 소위 반국가단체의 명칭이 되었고, 백일잔치 모임은 반국가단체의 결성모임으로 조작되었다.
오송회사건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이 월북시인 오장환의 <병든 서울> 필사본을 복사해 몇몇 교사들과 돌려보았던 것이 발단이었다. 이 시집을 빌려간 한 대학생이 그만 버스에 그 책을 두고 내렸고, 수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 시집을 가진 사람들이 현직 국어교사였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1982년 11월 2일 경찰은 군산제일교교 이광웅 교사 등 9명을 불법연행하고 20일 이상 가혹한 고문과 공갈, 협박을 가해 조직사건을 만들었다.
오송회는 이들이 근무하는 학교 뒷산에 소나무 다섯 그루가 있는 곳에서 모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깨어있는 교사이기를 원했던 이들은 어느 때부터 없어진 4.19기념일에 위령제라도 갖자며 소나무 아래서 4.19와 5.18 희생자 추모의식을 마치고 술 몇 잔을 나눠 마신 적이 있었다. 이것이 반국가단체를 조직한 것으로 둔갑한 것이다.
횃불회사건
횃불회는 1981년 10월에 광주지역에서 야당활동을 하며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친목을 목적으로 만든 계모임이었다. 횃불회의 회원 다수는 민주통일당의 광주 지역당원 또는 당직자들이었고, 5.18관련자와 민주헌정동지회 회원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횃불회라는 이름은 회원 중 한사람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타오른다’, ‘봉화를 피운다’ 등에서 착안된 것인데, 여기에는 5.18 이후 어두운 시대를 밝히자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이들은 1982년 3월23일 밤 영장 없이 경찰에 연행됐다. 수사기관은 횃불을 북한과 연계시키려 했고, 혁명 모의로 규정했으며, 이를 인정하라고 강요하며 강도 높은 폭력과 고문을 가했다. 그러나 경찰은 결국 4명만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고, 나머지는 훈방 조처했다. 82년 1심에서 1명 실형, 3명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2심에서 전원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이 사건의 관련자 기종도는 5·18 관련자로 옥고를 치른 뒤 또다시 ‘횃불회’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수감 도중 얻은 병이 악화돼 사망했다. 또 다른 관련자 공영석은 출소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문밖출입도 못하고 13년간 투병하다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