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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시위, 6.26 광화문연합시위
1978년은 5월 18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9대 대통령 선출, 1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가 겹친 해였다. 이 선거들은 박정희 정권에게 유신체제를 공고화하기 위해 중요한 일정이었다.
5월 18일에 실시되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앞두고, 5월 8일 서울대생 1,500여 명은 <학원민주선언>을 발표하고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선언문에 '1) 5월 19일부터 일주일간 통체선거 반대 동맹휴학을 단행한다 2) 해고된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위한 모금에 적극 참여한다. 3) 유인물 제작‧살포, 비판적 가요의 보급, 학내 곳곳의 낙서를 통해 학내언론을 활성화한다 4) 학내 분위기의 활성화를 위해 각종 집회를 최대한 활용 한다.' 등의 행동지침을 제안하였다.
이날 1시간 동안 격렬하게 전개된 시위는 경찰기동대의 투입으로 진압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봉천동, 신림동 등지에서 '유신철폐'를 외치며 가두투쟁에 나섰다. 서울대 학생들은 학원민주선언에서 제시한 행동지침에 따라 5월 19일부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6월 12일 서울대 시위는 6월 26일 광화문 가두시위를 예고한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3,000여 명의 학생들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외치며 3시간 동안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날 발표된 <학원민주선언>은 "6월 26일 오후 6시 세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시내 전 대학생과 시민이 집회를 갖는다."고 행동지침으로 제시하였다. 6월 26일 광화문 가두시위를 선전하기 위한 유인물 살포와 낙서가 곳곳에 행해져서 이 제안은 각 대학 학생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다.
경찰은 예고 시위에 대비하여 많은 민주인사들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미행‧감시‧연금을 시행하고, 6월 26일 광화문 일대에서 삼엄한 검문‧검색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대응도 시내 중심가에서 시도된 시위를 막을 수 없었다.
6월 26일, 시위가 예정된 6시쯤 함석헌, 박형규 등 민주인사들과 서울대, 고려대, 이화여대 등 대학생들은 삼엄한 검문‧검색을 뚫고 세종문화회관 앞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그 수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6시 40분경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정의가' '흔들리지 않게' 등을 부르면서 스크럼을 짜고 광화문 쪽으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미리 진을 치고 있던 경찰기동대들이 학생들을 광화문 쪽으로 몰아 부치기 시작하자 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다가 다시 집결하는 양상을 반복하며, 밤 10시 30분경까지 서소문, 종로, 무교동 등 광화문 일대 도심지를 누비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시위에 참여하였던 대학생 70여 명이 연행되어 이 가운데 20명이 구속되고 22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6월 26일 광화문연합시위는 1972년 이후 교내시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학생들이 서울의 중심가로 진출해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벌였다는 점과 대학생은 물론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까지 동참한 연대시위였다는 점, 사전에 시위를 예고하였음에도 정권이 막아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으며 박정희 정권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