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주메뉴 바로가기

글자 크기 조절

민주구국헌장

1977년 3월 22일, 대법원에서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에 대한 상고심 재판이 있었다. 대법원은 김대중 등 피고 18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고등법원에서 내려진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대법원의 확정판결이 내려진 날, 윤보선 전 대통령 등 재야인사 10명은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은 철폐되고 무효화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시국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성명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다.


(...)

우리는 이 문서가 민주시민들 사이에 널리 전파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을 기대한다.

1. 3.1민주구국선언과 1.23원주선언은 모든 민중의 선언이다. 우리는 민중의 선언을 탄압하는 법정에서 선언에 참여한 인사들과 함께 서 있음을 자처한다. 3.1민주구국선언 피고인들의 상고이유서는 바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모든 민중의 역사와 진리의 법정에의 상고이유서이다. 

(...)

3. 이 시점에서 현 정부가 민족사적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의 철폐와 무효선언 ㉡ 모든 정치범의 완전한 인권회복과 비민주적 제도와 법의 폐지 ㉢ 고문, 사찰 등 폭압과 정보정치의 종식 ㉣ 언론, 학원, 종교의 자유 및 사법권 독립의 보장 ㉤ 노동자, 농민 등 모든 민중의 생존권보장 ㉥ 국내외적으로 부정, 부패의 척결과 정당하고도 공개적인 선린외교의 자세 확립을 지체 없이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
우리는 이 문서를 우리 자신이 범국민적인 민주국민연합을 이룩하기 위하여 노력하겠다는 약속으로 삼는다. 

민주주의 만세! 


1977년 3월 22일

윤보선, 정구영, 윤형중, 천관우, 정일형, 양일동, 함석헌, 지학순, 박형규, 조화순

유신정권은 민주구국헌장 발표를 처음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명자 10명을 방문하여 서명경위에 대해  조사하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그 이후 민주구국헌장의 취지에 동의하고 서명하는 사람이 날로 늘어나 종교계 인사, 문인, 언론인, 학생, 정치인 등 100여 명이 넘게 서명을 하고, 4월 11일 서울대 시위에서 배포되는 등 사회적 반향이 커지자 유신정권은 민주구국헌장 서명운동을 문제시하기 시작했다. 

서명운동과 관련하여 구속자가족협의회 어머니들을 비롯해 100여 명의 사람들이 연행되고 조사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민주구국헌장을 전달했던 박종렬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기소되어 징역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고, 4월 15일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시위를 시도하려다 사전 발각되어 조사를 받았던 정명기 전도사와 4명의 학생들은 민주구국헌장을 소지하고 이를 읽었다는 이유로 징역 1~2년의 실형을 언도받았다.

이에 대하여 민주구국헌장 지지 서명자들은 서명자인 자신들이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구국헌장을 가지고 있거나, 읽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거나 실형을 선고 받은 것은 법의 형평적용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니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서명자인 우리를 구속시키라는 입장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렇듯 정부 당국은 민주구국헌장 서명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민주구국헌장을 보거나 서명했다는 이유로 강제 연행하고 그중 일부를 구속하는 등 강경탄압으로 대응했다. 정부 당국의 탄압으로 민주구국헌장에 대한 지지 서명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반민주성은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으며 민주화운동의 정당성이 국민들에게 깊이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