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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 - 펜의 힘을 보여준 언론자유수호투쟁

1974년 10월 24일 오전 9시경, 동아일보 광화문 본사 3층 편집국으로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사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 소속 기자 180여 명이었다. 전날 밤샘 농성으로 인해 기자들의 머리는 부스스했고 얼굴도 해쓱했다. 대회가 막 시작되기 직전, 편집국으로 통하는 계단과 복도는 어느새 모여든 기자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어이, 김 기자. 밤새워 농성을 해서 그런지 눈이 쑥 들어갔네. 힘들지?”

“유 기자도 마찬가질세. 하지만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어제 중앙정보부로 연행된 송 국장과 두 부장들 아닐까? 아직까지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말이야.”

“이틀 전엔 한국일보 장 사장과 김 국장을 끌고 갔잖은가? 그런데, 그놈들이 하루 만에 우리 신문사 간부들을 세 사람이나 연행해 가다니! 허, 보통 큰일이 아닐세. 이참에 언론을 아예 말려 죽일 셈인가?”

김 기자는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유 기자는 밤샘 철야농성 때의 흥분이 되살아나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9시 15분이 되자, 한국기자협회(기협) 동아일보 분회 집행부 간부가 기자들 앞으로 한발 나서며 커다랗게 외쳤다.

“자, 시간이 되었으므로 지금부터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의 개시를 선포합니다.”

대회가 선포되자, 제12대 기협 회장 김병익이 나와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것임을 선언한다.”

선언문에는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가 주장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자성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선언문의 핵심은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하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주는 것은 아니다.”는 문장이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기자들이 힘을 합쳐 주체적으로 언론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유신 선포 이후 박정희 정권은 언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강행했다. 기관원들이 신문사에 마음 놓고 들락거리며 기사를 검열하는 것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정부는 행정기관 내 기자실 문을 폐쇄한 뒤 기자들을 밖으로 내몰기까지 했다. 박정권은 언론의 눈을 가려놓고 마음껏 국정을 쥐락펴락했다. 유신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들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구타를 당했다. 언론사 사주들은 정권의 편에 서서 기자를 타 부서로 이동시키거나 해고시켰다. 기자들은 한동안 제대로 된 항거조차 하지 못했다.

긴급조치가 발령된 뒤, 언론인에 대한 연행은 봄부터 여름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중앙정보부는 베트남 문제 해설 기사를 꼬투리 삼아 10월 22일 한국일보 장강재 사장과 김경환 편집국장을 연행했다. 이에 격앙된 한국일보사 기자들은 곧바로 농성에 돌입했다.

“우리 기자들은 장 사장과 김 국장을 풀어줄 때까지 철야농성에 돌입한다.”

비슷한 일은 동아일보사에서도 일어났다. 10월 23일, 송건호 국장은 수원 주재 기자가 송고한 기사를 사회면에 보도하라고 지시했다. 서울대 농대 수원 캠퍼스에서 대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했다는 짤막한 기사였다. 자기 자리로 돌아와 새로운 원고 하나를 막 읽으려 할 때, 기관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수원에서 서울대 농대생들이 시위를 했다면서요?”

“그게 어때서요?”

“대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기사가 나가면 안 됩니다.”

“알다시피 그것은 그냥 뉴스요.”

“당장 기사 빼세요.”

“무슨 권리로!”

“하여튼 빼기나 해요. 그런 뉴스가 나가면 각하께서 싫어하십니다.”

“여기는 신문사요. 기사에 관한 권한은 나에게 있소. 나가시오!”

송 국장이 호통을 치자 기관원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송 국장은 바로 옆의 기자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비중이 큰 기사도 아닌데 저 친구는 왜 늘 저 모양이야?”

“긴급조치가 선포된 뒤부터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더 심해졌어요.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만 해도 감옥에 보낸다는 조항 때문일 겁니다. 신문사에 뻔질나게 드나드는 기관원 놈들은 또 얼마나 방자해졌는데요. 내 원 참…….”

기자가 맞장구를 치며 아니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서울 농대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에 관한 기사는 충분히 뉴스 가치가 있었다. 긴급조치의 서슬이 시퍼럴 때여서 더욱 그랬다.

그날 오후, 신문이 가판대에 깔리기가 무섭게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송 국장! 그 기사를 빼라고 했더니, 왜 내 말을 안 듣는 거요?”

“언론인은 사실을 진실대로 보도하는 사람이오. 내가 틀렸소?”

“잔말 마시오. 어서 끌어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송 국장은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같은 말을 묻고 또 물으며 진을 뺐다. “빨갱이 같은 놈.” 어쩌고 하면서 송 국장에게 함부로 반말과 욕설을 퍼붓기가 예사였다. 중정 요원들은 함께 끌고 간 박중길 방송뉴스부장, 한우석 지방부장에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지거리와 폭언, 구타를 가하며 모멸감을 안겨주었다.

이들이 남산에서 온갖 수모를 당할 때, 동아일보 편집국에서는 수백 명의 기자들이 귀가를 포기한 채 간부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기협 간부들은 따로 둘러앉아 대책을 논의했다.

“송 국장이 남산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은 좀 심하군요.”

“보통은 열대여섯 시간 정도면 풀려나셨는데, 오늘은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되고 있습니다. 조사할 게 뭐가 있다고…….”

“한국일보 사주와 국장까지 연행된 마당이니,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닌 듯싶습니다. 기협 차원의 단호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당연한 말씀이오. 우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소! 내일 오전 9시경,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우리 언론인들의 실천선언을 발표합시다.”

김병익 회장의 제안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옳소!”를 연발했다. 이렇게 해서 기협 간부들을 포함한 동아일보 기자 180여 명이 10월 24일을 기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채택한 것이다. 이 모습을 뉴욕타임즈, 아사히신문, AP통신, 교토통신 등 외신기자들이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이들의 신속한 보도로 자유언론실천선언에 관한 소식이 해외 각국으로 타전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자, 정작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제동을 걸었다.

“당신들이 발표한 선언문을 우리 신문에 실을 수 없소.”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는 언론인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사화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아무런 기사도 쓰지 않을 것이오.”

신문 제작 거부라는 초강수를 두며 맞선 기자들은 결국 경영진을 굴복시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사화하는 데 성공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거사는 강력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날 밤 9시 20분경, 조선일보사 기자 150여 명이 편집국에 모여 ‘언론자유 회복을 위한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들은 선언문 채택과 아울러 “1) 자유언론을 수호하기 위해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이를 배제하고, 2) 언론인들이 보도 활동과 관련 부당하게 연행 구금당할 경우 귀사할 때까지 철야농성을 하며, 3) 학생, 종교인 등 각계의 정당한 의사 표시는 반드시 게재한다.”는 등의 3개 항을 결의했다.

같은 날 밤 7시 30분경, 한국일보사 기자 130여 명도 편집국에 집결해 사장과 편집국장의 연행 사실이 한국일보에 보도될 때까지 제작을 거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은 25일 새벽, “앞으로 민주언론을 사수할 것을 결연히 선언한다.”는 내용의 ‘민주언론 수호를 위한 결의문’과 4개 항의 행동지침을 채택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국일보 기자들의 선언문 채택이 연달아 이어지자, 이 열기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경향신문, 동양통신, KBS 등 31개 신문, 방송, 통신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치며 언론자유 수호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심지어 그동안 유신정권의 입노릇을 해온 관영방송과 정부 기관지 및 여당계 신문과 방송의 기자들까지도 이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 열기가 확산되는 동안 동아일보에서는 당장 중앙정보부에서 내려준 보도지침을 무시했고, 유신헌법에 대한 개헌문제를 사설로 내보냈다. 또한, 기관원들에 의해 기사가 삭제되거나 바꿔치기 되는 일이 없도록 자체적으로 기사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소식지 《알림》에 게재함으로써 문제 해결과 소통의 장을 넓혀 나갔다.

박 정권은 이러한 언론인들의 움직임에 대해 노발대발하며 당장 언론사 경영진에게 압력을 가했다. 경영진은 권력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는다면 가만 안 두겠어.”

1974년 12월 16일, 박 정권은 광고주들을 직접 협박해 광고를 중단시켰다. 이미 광고 재원 의존도가 80%에 달했던 동아일보사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1974년 12월 25일 오전, 동아일보 기자들은 편집국에 모여 긴급총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광고 계약의 전면적 철회 경위를 즉각 신문과 방송에 자세히 보도하고, 철회된 광고 면을 백지 그대로 제작할 것”을 결의했으나 경영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4년 12월 27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우리는 최근 언론에 대한 당국과, 또는 경영주에 대한 당국의 압력이 한국의 자유언론에 대한 중대한 위협임을 지적, 이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28일에는 NCC 인권위원회와 광주기독교연합회도 동아일보 광고탄압을 규탄하고, 동아일보 구독운동 전개와 성금 보내기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후, 원로 언론인 홍종인이 동아일보를 방문해 격려 광고를 실은 것을 계기로 전국의 수많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격려 광고가 봇물을 이루었다. “자유의 횃불을 밝히는 기름 한 방울의 성의를 표한다.”, “우리는 안다. 백지광고의 의미를” “동아, 너의 붓이 곡예를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너의 고난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각양각색의 사연들로 넘실거리는 광고 성금이 동아일보사에 끝도 없이 줄을 이었다. 유신정권의 광고탄압은 오히려 전 국민의 언론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권력에 굴복한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끝내 130여 명의 젊은 기자들(동아방송 소속의 프로듀서, 아나운서 포함)을 대량 해고함으로써 모처럼 타오르던 자유언론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조선일보사 경영진도 30여 명의 기자들을 전격적으로 해고시켰다. 이 사상 초유의 대량 해고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에는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해직기자 군단’이 양산되는 재앙이 벌어졌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추방당한 기자들은 각계각층의 지원과 격려를 받으면서 투쟁조직을 만들어 유신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해 나갔다.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한국 언론민주화운동의 초석이 되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