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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 헌정 질서를 파괴한 종신 총통시대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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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7일 오후, 서울 세종로에 커다란 전차와 장갑차가 요란한 캐터필러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탱크를 앞세워 중무장한 군인들이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는 사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는 중대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 채 전파 매체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국에 중계된 방송을 통해 대통령 박정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 나라를 암흑 속에 몰아넣은 〈10․17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순간이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평화통일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진영의 대동단결을 촉구하면서 오늘의 이 역사적 과업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일대 민족 주체세력의 형성을 촉성하는 대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약 2개월간의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중지시키는 비상조치를 국민 앞에 선포하는 바입니다.”

특별선언의 요지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 지향과 민주주의의 토착화,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자유경제 질서 확립, 자유와 평화 수호의 재확인”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속에 도사린 것은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을 가능케 할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의지였다. 그 토대는 곧 유신헌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일 국민 여러분이 헌법개정안에 찬성치 않는다면 나는 이것을 남북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국민의 의사표시로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했다. 개헌을 반대하는 것은 남북대화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었다. 국민에 대한 일종의 협박이었다.

이날 저녁 7시, 계엄사령관인 노재현 육군 대장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곧이어 계엄사 포고문 제1호가 발표되었다. 포고문은 나라 안 거리 곳곳마다 나붙었다.

“1. 정치 활동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2. 언론·출판 보도 및 방송은 계엄사의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한다. 3. 각 대학은 당분간 휴교한다. 4.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행위를 금한다. 5. 유언비어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앞으로 이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수색, 구금한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인의 정당 활동이 일절 금지되었다. 표현의 자유도 당장 제약이 가해졌다. 한반도에는 갑작스레 정치적 빙하기가 찾아왔다. 모든 것이 급속도로 결빙되었다.

그날 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야당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모처로 잡혀 들어갔다. 박 정권은 이들 야당 의원들에게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었다. 1971년 10월 2일, 야당인 신민당의 주도로 국회에서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안이 가결되어 통과된 일이 있었다. 신민당은 당시 물가 폭등, 실미도사건, 사법파동의 책임을 물어 오치성 내무부장관,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신직수 법무부장관에 대한 해임안을 제출해 표결에 붙였던 것이다. 국회 표결 결과 내무부장관 해임안이 통과되어 경질된 일로 인해 대통령이 크게 격노한 바 있었다. 

신민당에는 대통령 박정희와 맞서는 두 사람의 정치 지도자가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이날 끌려간 의원들은 이들 두 의원과 관련이 깊은 인물들이었다. 박정희는 열두 명의 의원에게 치욕을 안김으로써 10월유신에 대해 아무도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도록 했다. 일종의 희생양으로서 보안사에 끌려간 그들은 알몸으로 집단 구타와 물고문을 당했다.

“우리는 너 같은 새끼 하나 죽여 시체를 산에 갖다 묻고는 자살했다고 상부에 보고하면 그만이야. 넌 살아서 못 갈 줄 알아.” 기관원들은 아무 질문도 없이 무조건 옷을 벗겼고, 시멘트 바닥에 쓰러뜨린 뒤 각목으로 사정없이 온몸을 구타했다. 그들은 물 적신 모포를 몸에 감아서 마구 때렸다.

생지옥 같은 이 일들은 사건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1975년 2월 28일자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리면서 비로소 밝혀졌다. 보안사에 끌려간 이들은 조윤형, 홍영기, 이종남, 조연하, 김녹영, 김경인, 최형우, 박종률, 강근호, 이세규, 유갑종, 김상현 등 제8대 국회의원 12명이었다.

김녹영의 경우 “본인은 1972년 10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1주일간 모 기관에 강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그 방법이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잔인하고도 무도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조사관들은 다짜고짜 폭행을 가하며 옷을 강제로 벗긴 뒤 팔다리를 거꾸로 달아맸다. 그들은 얼굴에 수건을 씌운 다음 물을 안면에 쏟아 부어 질식케 했다. 그와 동시에 기관원들은 곤봉으로 팔과 다리를 난타하면서 무엇인가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조사관들은 “끝을 낼 터이니 김대중 씨 조직과 자금 출처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의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들 모두는 인간 이하의 욕설과 고문을 받은 뒤 초죽음이 된 다음에 풀려났다. 이러한 악행은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보도가 통제되었고 보안사 기관원들의 협박이 엄중했기 때문이었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고, 정부가 나서서 헌법개정안에 대한 지지 유도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이른바 ‘지도계몽’이라는 형식으로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향후 어떠한 정당이나 개인도 헌법개정안에 대해 찬반 의사 표시를 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정부의 일방적인 홍보 이외의 것은 모두 불법이었다. 이날 비상국무회의는 헌법개정안을 의결해 공고했다.

“정부가 마련한 헌법개정안은 한 달 이내에 국민투표로써 확정할 것입니다.”

11월 15일, 헌법개정안에 대한 홍보를 위해 김종필 총리가 나섰다. 그는 대전에 내려가서 유신헌법에 대한 찬양과 선전 연설에 열을 올렸다. 방송은 김 총리의 선전 연설을 전국적으로 중계했다. 그만큼 박 정권은 헌법개정안 통과에 사활을 걸었다. 공무원들은 시민들에게 헌법개정안을 왜 통과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구구하게 설명했다.

이 전대미문의 헌법개정안은 미처 통과되기도 전에 법률적 효력을 지닌 것처럼 위세를 떨쳤다. 박 정권은 이 조치를 스스로 ‘10월유신’이라 불렀다.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10월에 발표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해 11월 21일, 계엄군의 감시 하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 당일, 사람들은 긴장감 속에서 투표소로 향했다. 당시는 일명 ‘막걸리 보안법’이 판을 치던 세상이었다. 까딱만 잘못해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는 일이 항다반사였다. 이 때문에 헌법개정안을 반대하다가는 자칫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험한 꼴을 당할까봐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기표소 안에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공연히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혹시 누가 나를 감시하지 않을까?’

이날은 기온마저 뚝 떨어져 몹시 추웠다. 모두들 잔뜩 몸을 움츠려야 했다. 이 땅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가득 찼다. ‘반대’라 쓰인 공란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다. ‘찬성’ 쪽 공란에 인주를 묻힌 붓뚜껑을 꾹 누른 뒤, 선명히 찍힌 동그라미를 확인하고서야 두근거리는 새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휘장 밖으로 나와서 안도의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불과 11년 전, 그들은 이승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4․19혁명의 주역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에 억눌리면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헌법개정안은 투표율 92.9%에 찬성 91.5%로 통과되었다. 전제 왕조시대도 이보다 더 압도적인 찬성률을 보일 수는 없을 터였다. 유신헌법 통과는 5․16 군사반란에 이은 또 하나의 쿠데타였다.

유신헌법이 선포된 뒤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입법, 사법, 행정 등 삼권을 한손에 거머쥔 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공포 분위기가 이 땅에 확산되었다.

박정희는 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된 뒤 장기집권의 포석을 깔았다. 종신 총통에 오른 그는 맨 먼저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유신을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 그 자리에서 감옥에 보낸다는 엄포였다. 그 바람에 한반도의 모든 것들은 숨을 죽였다.

여기, 1970년대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하나의 장면이 있다. 1974년 4월 5일, 박정희는 군포 야산에서 식목일을 기념해 오동나무를 심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청학련 대학생 놈들은 보고를 들어보니 순 빨갱이들이야. 잡히기만 하면 모두 총살이야.”

박정희의 코앞에 있던 경기도지사와 각 신문사 기자들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청와대 대변인은 박정희의 발언에 대해 “없었던 얘기로 해 달라.”는 보도지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이 무시무시한 발언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듬해 4월 9일, 박정희가 벼르던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인혁당재건위 혐의로 구속된 여정남 등 8명이 사형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민청학련 배후조종죄’였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1959년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진보당 조봉암 사형 집행과 더불어 2대 사법살인으로 남아 있다.

박정희의 식목일 발언은 20년 뒤에야 공개됐다. 1992년,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가 쓴 《정치공작 사령부(KCIA) 남산의 부장들》라는 책이 출간되면서였다.

국헌을 문란하게 만들면서 강제로 통과시킨 유신헌법은 한마디로 법 위에 군림한 초헌법이었다. 이 법을 무기 삼아 유신체제가 들어선 뒤, 이 땅에는 숱한 불행이 잉태되었다. 유신헌법의 폐해 가운데 가장 나쁜 점은 국민의 손으로 나라의 큰 일꾼인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게 한 점이 그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는 권한을 부여잡은 뒤 자신의 친위부대를 직접 뽑았다. 그는 또한 헌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긴급조치권을 휘두름으로써 절대 권력의 소유자가 되어 국회 해산권과 법관 임면권을 손에 쥔 채 삼권 위에 군림했으며,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합법화했다.

유신헌법이 제정된 지 어언 40여 년이 지났다. 국민 위에 군림하는 법이 과거 어느 한때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새삼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구절이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늘 권력을 감시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푸른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또한 이 귀한 헌법의 조항이 우리의 안전한 울타리가 된다는 것을 제4공화국의 독재자에게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