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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시위Ⅱ - 10.17 광화문연합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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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6월 12일, 서울대 학생들은 <학원민주선언>을 통해 '6월 26일 오후 6시 세종로 네거리에서 서울시내 전 대학생과 시민이 집회를 갖는다'고 광화문 시위를 예고했다. 학생들의 예고는 공안 당국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시위에 대비하여 많은 민주인사들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미행‧감시‧연금을 시행하고, 광화문 일대에서 삼엄한 검문‧검색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6월 26일 민주인사, 학생 등 1,000여 명이 공권력의 통제를 뚫고 광화문에 집결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과 연행으로 일시 해산했다가 다시 집결하는 양상을 반복하며 밤 늦게까지 광화문 일대 도심지를 누비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공안 당국의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시내 중심가에서 벌어짐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 유신반대투쟁을 직접 선전하는데 성공, 박정희 정권에게 큰 타격이 되었다. 

6월 26일 광화문연합시위 성공을 계기로 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은 고조되었고 2학기에 접어들어 더욱 확대되었다. 

6월 26일 광화문연합시위에 성공하여 자신감을 얻은 서울대 학생들은 9월 13일 <민주회복 반독재 선언> <민주시국선언> <민족민주교육을 위한 우리의 주장> 등을 배포하며 2,500여 명이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는 3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600여 명의 학생들은 상도동 장승배기에 집결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었다. 학생들은 선언에서 '10월 17일 오후 6시 세종문화회관 광장에서 유신독재타도를 위한 범시민학생 궐기대회를 갖는다.'고 예고했다.

10월 17일로 예고된 광화문연합시위를 위해 대학연합 그룹과 서울대 내부 그룹들이 치밀하게 준비해 나갔다. 이들은 대학생들의 유신반대투쟁 동참을 호소하는 유인물을 대량 제작한 뒤, 버스 환기통에 유인물을 올려 공중으로 날아오르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활용해 서울 시내와 대학가에 배포하였다. 

경찰은 예고된 시위 전날인 16일부터 민주인사 300여 명을 강제 연금하였고, 당일에는 전국의 경찰 병력을 차출하여 종로와 광화문 일대에 삼엄한 경비망을 펼쳤다. 정부는 시위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민방위 등화관제훈련까지 실시하였다. 

민주인사의 연금과 시위를 준비하던 6개 대학 학생 27명이 사전 구속됨으로써 10월 17일 예고된 광화문연합시위는 좌절되었다. 

비록 10월 17일 광화문연합시위는 좌절되었지만 정보정치와 극한적 탄압 속에서도 학생운동의 역량은 강화되어 갔고, 유신반대투쟁은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