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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골을 깨운 「78 민중선언」

고대의 침묵을 깬 「78 민중선언」

1978년 9월 14일, 고려대에서 3,000여 명의 학생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를 치밀하게 준비해왔던 이혜자(생물학과 74), 천상만(행정학과 75), 오상석(경제학과 76) 등 3명은 각자 단과대 강의실에 유인물을 살포하며 학생들의 동참을 유도하였다. 이들은 진압을 시도하는 기관원들을 뿌리치고 대강당에 300~400명의 인원을 모았다. 학생들은 「78 민중선언」을 낭독한 뒤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진출이 무산되자 학생들은 연좌시위를 벌였다. 한편 200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 옆에 자리한 기관원 상주 초소를 부수고 학원 내 동태를 보고하는 경비일지를 불태웠다. 경찰은 무자비하게 학생들을 폭행하고 연행해갔다. 이날 시위로 52명이 연행되고 7명이 구속됐다.

9월 19일, 연행사태에 항의하여 50여 명의 학생들이 법대 강의실에서 유인물을 살포하고 농성을 했다. 


시위 주동자들의 이야기

◯ 이혜자

그 날 서로 강의실 하나씩 맡아 갖고 들어가서 선동해서 나오는 거였는데, 나는 법대 강의실에 가서 대강당으로 가자고 선동했고, 유인물을 나눠줬어요. 그리고 대강당으로 가니까 대강당이 꽉 차게 학생들이 들어오더라구요. 오상석 씨는 강의실 나오자마자 형사들에게 연행이 되는 바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형사들하고 몸싸움해서 빼돌려가지고 수갑 찬 채 도망을 갔고, 천상만 씨는 무사히 대강당까지 학생들하고 스크럼을 하고 왔어요.

천상만 씨가 준비한 유인물을 낭독하고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교문 앞까지 왔죠. 우리는 대강당에서 선언문 낭독하고 스크럼 짜서 나오는 것까지만 준비를 했어요. 그때 상황은 거기까지만 가도 다행인 거였죠. 그 뒤의 상황은 준비가 없었어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아서 교문 앞까지 왔는데 거기 도달해 보니까 천상만과 오상석 씨 둘 다 없었어요. 사람들은 다 앉아 있고... 그때부터 임기웅변으로 가야 했죠. 플래카드 두 장을 준비해서 친구한테 맡겨놨었는데, 가방을 달라고 해서 플래카드를 꺼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주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어요. 교문 밖에서는 전투경찰들이 와서 대오를 형성하고 밀고 들어올 준비를 하더라고요. 본교 정문 옆에 경비실이 있었는데 성북서와 직통전화가 가설된 정보초소 역할을 하는 곳이었지요. 제가 저게 성북서 형사들 정보초소인데 때려 부수자고 하면서 발로 한번 찼죠. 그랬더니 학생들이 다 같이 때려 부수었죠. 그 후 상황은 내 역할이 없겠더라고요. 친구하고 후문으로 나오다가 잡혔어요. 사전에 우리는 도망갈 것에 대해 의논을 못했어요. 다 현장에서 빨리 잡혀갈 줄 알았어요. 얼마나 시간을 끌 수 있는지도 아예 상상을 못한 일이었어요. (고대학생운동Ⅱ 34~52쪽 발췌)

◯ 천상만

우리 세 사람은 8월쯤 만나 9월에 데모를 주동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14일이 아니라 13일이나 12일에 하기로 했어요. 준비를 하는 일환으로 남대문에 가서 가리방(원지를 긁는 철판)과 원지, 잉크, 종이를 샀어요. 12일에 새문안교회 구로동야학에서 가리방을 긁어서 전단지를 만들어 가방에 넣어 놓고 잠을 잤는데 건물 2층 교실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 전단지가 다 젖어서 못쓰게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전단지가 없는 상태에서 데모를 할 수 없으니까 13일에 못하고 다시 작업을 한 거지요. 13일에 사당동에 있는 희망교회에서 전단지를 만들고 거기서 잤어요. 그리고 14일에 택시를 타고 9시쯤 고대에 왔어요. 각자 전단지를 나눠서 가방에 넣고 임무 맡은 곳으로 갔어요. 11시에 서관 앞 강당 건물에 모이는 것으로 약속을 했어요.

나는 10시 30분쯤 강의 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강의실 밖으로 나가면서 본관 건물 2층 복도 쪽에서 전단을 뿌리기 시작했어요. 유리창으로 교실 안에 전단지를 확 뿌리면서 '고대건아 일어나라! 나가자 폭풍같이!' 그렇게 소리를 질렀어요. 애들이 2층에서 따라 붙었고, 본관 2층에서 서관 쪽으로 내려가면서 계속 전단지를 뿌렸어요.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전단을 뿌리니까 사복형사 두 명이 와서 내 허리춤을 딱 쥐어 잡더라고요. 사복형사가 나를 잡고 끌고 가려는데 주위에 있던 애들이 그때 날 살렸지요. 애들이 사복형사 두 명을 발로 패니 사복형사가 도망을 가더라고요. 강당에 가니 학생들이 300~400명이 모였더라고요. 내가 앞에 나가서 유인물을 읽었지요. 그때 이혜자 씨도 강당에 있었어요. 유인물 읽고 나서 내가 '나가자'고 했지요. 스크럼을 짜고 강당을 나와서 학교를 돌게 된 거지요. 바람을 잡아야 하니까 다시 본관 쪽으로 올라가는데 친구가 '넌 됐으니까 이제 빠지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나를 잡아 끌고 박물관 뒤로 갔어요. 친구와 뒷산을 넘어 학교를 나갔어요. 사실 그럴 계획은 없었는데 친구가 날 붙들고 가는 바람에...이혜자 씨와 오상석 씨에게 미안하지요. 나는 그 뒤의 상황은 몰라요. 내가 거기서 빠졌으니까. 내 역할은 거기까지 였지요.  (고대학생운동Ⅱ 108~126쪽 발췌)

◯ 오상석

78년 9월 14일 데모는 이혜자, 천상만 두 선배와 나 이렇게 셋이 주동한 건데, 75년 이후 학내 시위가 전혀 없던 터에 큰 규모의 데모로 학내외에 크게 알려진 사건이 됐지요. 

그날 나는 교양학부 도서관에서 유인물을 뿌린 다음에 서관으로 가서 학생들한테 유인물을 돌리면서 강당으로 모이라고 그랬는데, 서관 쪽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들이 보고 뛰어 들어서 수갑을 채워서 끌고 갔지요. 끌고 가는 걸 학생들이 달려들어서 형사들을 혼내줘서 나는 일단 거기서 도망칠 수가 있었지요. 그런데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 수가 없었는데, 대학원 다니던 선배가 어떻게 해서 수갑을 풀어 줬어요. 그거 풀어준 것 때문에 그 선배가 나중에 성북서에 잡혀가 고생했지요. 천상만, 이헤자 선배는 당일 날 잡혔고, 나는 그때 수갑을 풀고서 뒷산 너머 도망가서 두 달 정도 도망 다니다가 잡혔지요. 내가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두 달 늦게 구속됐죠. (고대학생운동Ⅱ 228~240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