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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악대첩과 얽힌 인생

이른 바, 무악대첩

1977년 10월 12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기도회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노영민(경영학 76), 김거성(신학 76) 이 “학원과 언론 자유 쟁취”, “박동선사건 철저 해명”, “중앙정보부 해체”, “노동자 권익투쟁지지” 등의 결의를 담은 구국선언서를 배포하고 낭독하면서 긴급조치 9호 선포 이후 연세대에서 발생한 최초의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강당에서 결의문을 낭독할 때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결의안을 복창함으로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확인하였다.

고조된 분위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10월 25일 2차 시위가 결행되었다. 강성구(경영학 76)가 대강당 4층의 폐쇄된 유리창을 깨며 현수막을 늘어뜨리고, 밑에서 대기하던 이상훈(응용통계학 75)이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를 준비한 학생들은 연세대 총학생 명의로 ‘77 연세 민주수호결사투쟁선언’을 배포하였다.

이날 시위는 학생 2,000여 명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고, 시위 학생 중 300여 명은 이화여대, 신촌로터리를 거쳐 서강대까지 진출하였다. 서강대에 진입한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자진해산하였다.

이날 시위는 긴급조치 9호 이후 최대 시위였고, 일본 「아사히신문」 에 보도될 정도로 파장이 컸다. 이 시위로 400여 명의 연세대생이 연행되었고, 그 중 7명이 구속되었다.

시위 주동자 외 구속자들의 이야기

◯ 뒤집어 쓴 죄: 공유상(경영학 76)

1977년 10월 연세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던 날, 소위 항간에서 1977년 가을 무악대첩으로 알려졌던 그 시위에서 뽕가(공유상의 동아리 후배 임봉석(중문과 77)의 별명,  군복무 중 1980년 강원도 화천에서 순직)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향해 시위대 스크럼에 묻혀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배구장 근처에서 한 형사가 여학생을 끌고 가려 하는 데 멀리서 보니 마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흥분한 학생들이 달려가 그 형사를 제지했고, 몸싸움을 벌이고, 결국 일단의 학생들이 그 형사를 때려눕혔다. 이를 본 뽕가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 대열에 합류했다.
당시는 시위 현장을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팀이 있어서 그 사진에 찍히면 영락없이 감옥으로 잡혀가야 하는 살벌한 시절이었다. 나는 뽕가를 뒤쫓아 가서 그를 뒤에서 안고 그를 말렸다. 그리고 그로 인해 형사를 팼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나는 감옥으로 가게 된다.
경찰과 검찰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때마다 그럼 그때 말렸던 네 후배라는 놈을 대라, 그러면 내보내줄게라는 조소를 들으면서 스스로에게 맹세를 했다. 내, 죽기 전에는 절대로 뽕가를 불지 않는다. 그리고 내 기억에서 뽕가를 지워버리려 무진 애를 썼다.
그 사건을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19살의 고시 준비생에서 정치범으로, 민주투사로, 혁명가로! 세상은 나를 감옥에 보냈지만, 나는 그 곳을 통해 자아와 이기심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훌륭한 인생의 스승들(선배, 동지, 친구)과 평생 삶에 새기고 갈 진정한 가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폭압적 독재의 쓴 찌꺼기와 교활했던 경찰의 술수와 답답한 사법적 권위의 매캐한 흙탕물 속에서 내 영혼을 간신히 건져 올렸다. (공유상 저, 「내 인생의 데자뷔」 발췌 )

◯ 완벽한 알리바이:  박성훈(화학공학 76)

학교에 남아 후배를 지도하기로 한 박성훈은 무악대첩이 일어난 시간, 초기 시위를 구경하다가, 북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갔다. 시위에 가담하지 않고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었던 박성훈은 사건 당일 밤 집 앞에서 부모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복형사에게 연행됐다.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은 박성훈은 꼬투리 잡힐 게 없었다. 판결문에도 ‘시위에 적극 가담하고….’라는 게 전부다. ‘박성훈이 돌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는 기독학생회 후배 여학생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였다. 그녀는 경찰의 회유․협박에 못 이겨 거짓 증언을 하고 뒤에 역시 울면서 증언을 번복했다. 하지만 번복한 증언은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동호 지음 「70년대 캠퍼스」 98~103쪽 발췌)

◯ 실패한 페인트 모션: 이대수(교육학 75)

연세대 학생운동을 이끌던 기독학생회의 리더 이대수는 시위가 벌어진 날 서대문경찰서에 있었다. 강성구, 이상훈과 시위를 모의한 적도 없고 시위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이대수는 자신이 구속되는 상황에 대하여 '‘속았구나! 아니, 내 실수다!' 땅을 쳤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이대수의 회고 “원래 계획은 24일인데, 사전 누설됐다. 정보가 샜는 데 주동자가 누군지는 모르는 거 같았다. 첩보를 접하고 일단 피했다가 다음 날 경찰에 자진출두 했다. 시위는 해야 되니까 중간에 ‘페인트 모션’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을 안심시키자는 것이었다. 내가 피해 다니면 경찰이 초긴장을 할 것이고 시위는 어려워진다. 시위 불발을 확신시켜주는 작전, 그걸 내가 들어가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동호 지음 「70년대 캠퍼스」103~104쪽 발췌)

◯ 분위기 고양 작업자: 오성광(교육학 76)

이대수의 학과 후배이자, 기독학생회 후배인 오성광은 이대수와 공모해 박동선 문제 등을 거론한 유인물을 만들어 1977년 10월 20일 중앙도서관 1층 남자 화장실에 살포한 것으로 되어 있다. 10월 25일의 본격 시위에 앞서 분위기 고양용으로 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대수는 ‘그런 권유는 한 거 같은 데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관계는 아니었다“고 한다. (신동호 지음 「70년대 캠퍼스」104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