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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온 수배전단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한 박정희 정권은 1973년 유신시대에 돌입하면서 독재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강화하는 한편 그 독재적 면모와 폭력성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었다. 소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유신체제 아래 김대중이 동경에서 납치당하는가 하면 최종길 교수가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협하는 커다란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졌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74년 1월 8일 박정권은 긴급조치 1, 2호를 선포하는데 이어, 4월 3일 밤 10시 대통령 특별담화문과 함께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에 대해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대학생들의 순수한 민주화 시위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폭력혁명으로 둔갑했다. 광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지나가면 울던 애도 울음을 멈췄다는 그 시절, 유신헌법 반대는커녕 동네사람과의 잡담이나 농담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모든 관공서와 학교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뉴스는 늘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땡박뉴스’라고 부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1974년 6월, 미국 시카고 시내 곳곳에 선명한 분홍빛 포스터를 붙이고 다니던 한 청년이 체포되었다. 일명 ‘핑크포스터 사건’이다. 청년이 붙이고 다니던 포스터는 박정희의 사진과 함께 영문과 한글로 ‘현상수배! 한국 민주주의 살해범 박정희. 이런 사람을 보면 죽었거나 살았거나 잡아올 것’이라고 쓰인 수배전단이었다. 포스터를 떼어내기 위해 면도칼로 긁어내면 더 선명하고 흉물스럽게 눈에 띄는 분홍빛 포스터는 전신주, 교회 앞, 한국영사관까지 한국 사람이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붙여져 있었다. 한국의 유학생, 재미교포 20여 명이 수백 장의 포스터를 밤거리에 몰래 붙였던 것이다. 경찰에는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좌익 활동으로 착각한 FBI의 특별명령이었다.

해외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것은 해외 교포사회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었고 때로는 감옥보다 더한 단절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모임과 집회를 위해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휴가를 얻어야 했고 어려운 살림에 주머니를 털어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중앙정보부 직원은 해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자칫 잘못하면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는 소문도 한국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그만 움직임이나 발언에도 조국 땅을 못 밟게 될지도, 조국에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고스란히 피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국땅이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이름도 명예도 없이 헌신적으로 몸 바친 해외동포들의 뜨거운 조국 사랑이 해외사료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