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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경찰 이근안을 잡아라!
1985년 12월 19일, 민청련사건으로 서울지방법원 재판정에 선 김근태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의 고문을 폭로했다.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사건 관련자, 옥사)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 테니까 그때 네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 ”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 그는 이근안이었다.
‘고문기술자’, ‘인간백정’, ‘지옥에서 온 장의사’ 등으로 불렸던 그는 민주인사를 비롯한 수많은 민주화운동사건과 용공조작, 간첩조작사건에 이름 없는 고문기술자로 등장했던 장본인이었다. 악명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정체는 그의 얼굴을 기억한 고문피해자들에 의해 1988년 12월 21일 한겨레신문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경기도경찰청 공안분실장이던 이근안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자 곧 자취를 감췄으며, 치안본부는 이근안의 고문사실을 부인했다. 여론에 밀린 검찰과 경찰은 12월 24일 이근안의 검거에 나서겠다고 발표했고 1989년 1월 6일에 그를 전국에 지명수배했다.
1989년 2월 21일,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어머니들은 ‘고문경관 이근안 국민수사선언’과 함께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전국에 현상수배했다. 민가협은 ‘경찰과 검찰이 이씨를 못 잡는 것이 아니라 비호하고 있기 때문에 고문피해자의 가족들인 민가협이 이씨를 수배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고문경관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1백만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이근안에 대한 현상수배와 국민수사가 전개되자 고문피해자인 남민전, 반제동맹사건 등 관련자와 가족들이 50여만 원을,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노무현 의원이 100만원, 일반 시민들이 현상금을 기탁했다. 민가협은 이근안을 검거하기 위해 전단 10만장, 스티커 2만장을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신문과 TV보도 등을 통해 널리 홍보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그는 1999년 10월 자수를 하기 전까지 10년 10개월 동안 ‘안 잡느냐 못 잡느냐’의 논란 속에 생사조차 확인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자수직후 단 한차례도 검문을 받지 않았으며 거의 10년간을 자신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고 했다. 그는 2000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한 사건으로 7년형을 받고 2006년 만기출소했다.
이근안의 고문으로 삶이 송두리째 망가졌던 고문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은 여전히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