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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 추방의 날, 최루탄에 희생된 이태춘 열사
1987년 6월 16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는 공동대표자회의에서 6월 18일을 '최루탄추방 국민결의의 날'로 정하고 전국적인 최루탄 추방대회 개최를 결정하였다. 6.18최루탄추방대회는 경찰의 직격 최루탄을 맞고 뇌사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던 연세대생 이한열을 비롯한 숱한 피해자들의 건강 회복을 기원하는 뜻이 담긴 대회였다.
6월 18일 오후부터 19일 새벽까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등 전국 16개 주요도심 247곳에서 국본 집계 최대규모인 150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최루탄 추방대회가 열렸다. 이날의 시위는 6.10국민대회 이후 최대규모의 동시다발형 시위였다.
부산에서는 6월 17일부터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17일의 시위는 18일 아침까지 계속 이어졌고, 심야에는 택시 1~2백대가 경적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부산의 10개 대학은 서둘러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6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 2만여 명이 부산대에 모여 출정식을 갖고 시내로 진출하면서 국본이 주최한 최루탄추방대회 행사와 시위가 시작되었다. 양정로터리와 부산진시장 주변에서부터 시민과 노동자들이 시위대에 참여하면서 시위 양상은 대규모 집회로 변했다. 부산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한 부산 시내는 대학생과 시민 30여만 명으로 가득 찼다. 왕복 8차선을 가득 채운 시민들의 대열에 한동안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도 진압을 포기하고 말았다. 남포동, 국제시장, 보수동로터리 등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위대가 형성되어 시위를 벌였다.
밤 10시경, 서면 시위대는 한 명씩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촛불 시위대는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함성과 함께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서서히 전진했다. 촛불 시위대가 범일 고가도로를 지나 좌천동 고가도로를 통과하려는 때, 전면에 있던 경찰이 갑자기 엄청난 양의 다연발탄과 최루탄을 쏘아댔다. 최루탄은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던 고가도로 위를 향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이한열을 뇌사상태에 빠트린 직격 최루탄이었다.
바로 그때 최루탄가스로 뒤덮인 고가도로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이태춘(태화고무 근무, 당시 27세)이었다. 그의 옷은 최루탄 가루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곧장 인근 재해병원으로 옮겼으나 위독한 상태여서 다시 봉생병원으로 이송되어 뇌수술을 받았다. 이태춘의 증세는 최루탄을 맞고 뇌사상태에 빠진 이한열과 같다고 하는 수술 의사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태춘은 추락 후 엿새 만인 6월 24일 저녁 8시에 결국 사망했다. 최루탄 피격이 있은 후 추락했다는 의혹이 일었지만 경찰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했다. 이태춘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태춘을 처음 후송한 사람을 찾아 만나기 위해 재해병원을 찾아갔지만, 이미 수납일지가 재작성되었고 후송자 명부는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6월 25일, 부산대학병원에서 실시한 부검 결과, 그의 직접적 사인은 뇌좌상이었고 오른쪽 이마 윗 부분에서 정수리를 거쳐 후두부까지 20.5cm에 이르는 종방향 두개골 골절이었다. 그외 신체 어느 부위에도 외상이 없었다.
6월 27일 오전 10시, 이태춘의 장례식이 범일성당에서 시민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장으로 열린 장례식을 마치고 부산국본 임원들과 시민들은 도로를 따라 문현동 로터리까지 4km를 2시간 30분 동안 행진하며 침묵시위를 벌였다. 철저한 보도통제와 경찰의 온갖 방해로 참석 인원은 6백여 명에 불과했지만, 소규모의 인원이었기에 장례행렬은 더 엄숙하고 비장했다. 이태춘은 양산 가톨릭공원 묘지에 묻혔고, 그의 죽음은 조용히 덮이게 되었다.
1997년, 문재인 변호사는 이태춘 가족을 대리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태춘의 죽음이 최루탄에 의한 국가의 불법 행위 때문이었음을 인정했지만, 소멸시효 만료를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2005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이태춘 열사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