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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님이 전하는 주한 일본 대사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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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에 대한 침해와 무역을 통한 압박이 강화되고 있는 2019년 8월에 주한 일본 대사관에 얽힌 이야기를 1971년 7월 정경연구에 실린 리영희(당시 합동통신 조사부장)의 글을 풀어 다시 한번 살펴본다.

1. 일본 대사관의 위치와 인상

「한국 속의 일본」은 일본 대사관 꼭대기의 일장기만큼이나 힘차게 펄럭이고 있다.
중앙청 앞 광장을 오른쪽으로 꺾어 한국일보 건물이 끝나는 길목을 끼고 들면 바로 거기에 일본 대사관이 있다.
대사관이 서 있는 땅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중학동 18의 2. 760여 평의 대지에 과히 넓지 않은 앞뜰만을 제외하고 말쑥한 색깔로 올려 지은 지하 1층에 지상 5층의 건물 앞에 서면 전체 건물의 크기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작아 보이는 각층의 창문이 「마지노」선의 거대한 토치카의 총안 같은 인상을 준다. 건물 전체의 개방적인 격식과 호사하고 부드러운 색깔이 아니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마련이다. (중략)
일체의 재료를 일본에서 들여다 지은 대사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중앙청을 직선거리로 3~4백 미터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어느 각도로 보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높은 한국일보 건물 뒤에 골목과 담을 넘어 사방을 많은 빌딩들에 둘러싸인 일본 대사관은 그것을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2. 일본 대사관이 현 위치에 자리 잡기

일본 대사관이 현재의 위치에 재작년 2월 준공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곡절과 말썽이 있었다. 65년 한일협정의 체결로 외교관계는 수립되었지만 그렇다고 즉시 으리으리한 대사관을 세우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시기와 상황이 적절치 않았다.
임시로 반도호텔에 방을 빌어 사무를 시작하면서 적당한 부지를 물색하기를 4년

1) 남산 터
처음 일본 대사관 건축문제가 일반 한국민에 알려진 것은 불행한 형태로였다. 「남산에 일본 대사관」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한 신문의 특종기사는 한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구 조선신궁 자리가 일본 대사관으로 물색 중이며 독립 한국의 수도를 내려다보는 성스러운 산 남산에 일장기가 꽂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중략)

2) 운현궁 건물
남산에서 혼이 난 대사관 측은 다음에는 운현궁 건물이 어떠냐는 이야기가 한국 측에서 났을 때 도리어 대사관 측에서 거절했다는 것, 쓰라리고 불쾌한 과거 때문에 서울 지도를 놓고 거의 현미경으로 더듬다시피 하기를 2년, 그러나 떳떳하게 일본 대사관의 간판을 걸기에는 어색한 뭣인가가 관련되더라는 것이다.

3) 1960년대 내무부 건물
일본 대사관 부지문제가 어렵게 되었을 무렵, 어떤 한국 저명인사는 당시의 내무부 건물을 추천했다. 내무건물은 일본 식민, 제국주의 아성인 구 동양척식회사.(현재의 외환은행 본점 위치)
(일본 대사관 직원 왈) “한국인이면서 그리고 저명인사이면서 이렇게 역사에 무감각한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우리 일본인 자신이 양민족 간의 역사를 신중히 고려하는데 바로 한국인, 그것도 그렇잖은 분이 그런 말을 해오니 우리가 안 놀래겠습니까?”

4) 현재의 위치가 된 사연
이런 곡절을 거듭하니 한일 경제협력 관계의 중요성이 시급해진 한국 정부 최고위층에서 직접 알선에 나섰다. 결국 남궁연씨 소유이던 중학동의 현 부지로 결정되어 정부의 주선도 있고 해서 시가보다 훨씬 싼값(26만원 정도)으로 낙착되었다.

3. 「침략적 왜놈 근성 쇠뭉치로 후려쳐라」 처럼

리영희 선생의 글은 주한 일본 대사관의 설치 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한국의 고위층이 지닌 역사의식의 잘 보여주고 있다.
55년 전 학생들이 들고 나왔던 플래카드의 「침략적 왜놈 근성 쇠뭉치로 후려쳐라」처럼,  일부 역사의식이 없는 언동에 대하여  「식민지 노예근성 쇠뭉치로 후려치고」,  정의롭고 평등한 한일관계 수립을 위해 「65년 체제를 쇠뭉치로 후려치는」  원년이 되는 2019년 여름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