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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법난을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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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0월 27일 새벽, 광주학살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사령부에 합동수사본부 합동수사단을 설치하고, '45계획' 작전을 실행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불교계 정화였다. 작전의 주요 내용은 보안사와 경찰력을 동원해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해 전국 사찰을 일시에 급습하고, 승려와 불교계 인사를 연행한 것이었다. 합동수사단은 먼저 10월 27일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 등 153명을 연행했다. 이어서 전국의 사찰·암자 5,731개를 일제 수색해 1,076명을 무차별 연행·고문했다. ‘10.27법난’이었다.

10.27법난은 신군부가 종교부문, 특히 불교계에 이른바 정화조치를 실시한 것이다. 정화조치란 전두환 집권 후 실시한 사회정화운동으로 구악을 폐하고 폭력배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실시되었으나, 사실상 쿠데타 정권의 국민 탄압 도구였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18년에 10.27법난 피해자 가운데 승려 2명, 공무원 1명, 그리고 신도 1명의 구술을 수집했다.

구술자 명선 스님과 삼보 스님은 합동수사단에 연행된 다른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10월 26일과 27일에 각각 보안대와 경찰에 연행되었다. 연행된 스님들은 각 지역의 보안부대로 이송되었고, 협박과 고문, 폭력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다. 스님들에 대한 조사의 공통 질문은 횡령, 축재, 여자관계 등이었다.

명선 스님은 1980년 정화조치가 실시될 당시 전라남도 구례군 화엄사 주지였다. 스님은 10·27법난으로 순천지역의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광주 505보안대에서 폭력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다. 이후 헌병대로 이첩되어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가 12월 31일에 석방되었다. 스님이 주로 조사를 받았던 죄목은 횡령이었다. 조계종은 스님에게 공권 정지 3년을 선고했고, 스님은 석방된 후 북한산 상운사와 영운사에 머물렀다. 이후 공권 정지가 해제되고, 종회의원이 되어 진상규명작업에 참여했다.

삼보 스님은 1980년 정화조치가 실시될 당시 오대산 상원사 주지를 반납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스님은 어머니(스님)의 일을 돕기 위해 보광사에 내려왔다가 10·27법난으로 천일공사로 위장해 있던 강원도 보안대로 연행되었다. 스님은 간첩 접촉, 횡령, 축재, 여자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무지막지한 폭력을 당하며 조사를 받았으나, 수사관들은 어느 것 하나 입증하지 못했다. 삼보스님은 제1군 사령부 법당에서 강제 환속식을 치르며 승적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삼청교육대로 이첩되어 지옥과 같은 교육을 마치고, 1981년 1월 4일 석방되었다. 이후 삼보 스님은 진상규명운동에 참여했다.

한영수는 1980년 문공부 종무담당관으로 종교계 업무를 통괄하는 고위공무원이었다. 10.27법난이 어느 정도 진행되고, 종단 내 자율적 수습이 결실을 맺으려 했던 11월 3일 한영수는 보안사로 연행되었다. 보안사의 조사는 부정과 비행에 초점이 맞추어졌고, 폭행과고문이 수반되었다. 한영수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문공부에서 해직되었다. 그의 동료들이 재판 비용을 모금해줄 정도로 일련의 상황은 억울했으나, 신군부가 희생양을 찾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근우는 자신도 보안사에서 취조를 받았던 피해 당사자였으나, 출가한 형인 혜성 스님에 대한 구술을 더 많이 했다. 도선사 주지로 청담학원 등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에 매진했던 혜성 스님에게 적용된 주요 혐의는 횡령이었다. 스님은 매우 부정적인 승려로 언론에서 매도되었고 승려의 신분도 빼았겼다. 혜성 스님은 경찰의 조사를 받던 중 입수한 '견지동 45계획'이라는 문서를 기반으로 10.27법난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다. 초반기 진상규명운동을 이끌고 지원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10.27법난 구술수집은 적절한 대상자를 물색하고, 면담을 허락받기까지 난항의 연속이었다. 면담을 의뢰했던 몇 분은 끝내 사절했고, 면담에 응해주신 분들도 최종 허락을 받기까지 몇 가지 이행 절차와 시간이 필요했다. 10.27법난 관련 피해자들의 다수는 노령과 질병으로 이미 사망해, 면담이 가능한 분들은 상당히 좁혀진 상태였다. 민간과 정부 차원의 10.27법난 진상규명 과정에서 피해자 면담이 이루어졌고, MBC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던 전례들이 있었지만 구술로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남기는 작업은 처음이다. 10.27법난에 관한 종합적인 자료수집과 증언수집을 위해 보다 다양한 피해자와 가해자에 대한 구술조사가 후속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도 10.27은 계속되고 있다

불교운동의 비약적 발전은 1980년 신군부의 광주학살과 10.27법난의 충격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