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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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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은 동원탄좌의 탄광노동자들과 가족들이 사측의 착취와 어용노조 횡포에 대항해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일대에서 총파업을 일으킨 사건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2018년에 사북항쟁 피해자 가운데 6명의 구술을 진행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노동자들은 산업역군이라는 미명 아래 오랫동안 열악한 노동조건에 있었고 노동탄압도 견뎌야 했다. 

1980년 당시 사북 노동자들은 노동력 착취와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며 생존권 투쟁에 나섰다. 계엄 당국은 이들을 '폭력 시위꾼' '빨갱이'로 몰아 구금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 뒤늦게 사북항쟁은 회사와 어용노조, 이를 묵인한 정부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재조명됐다. 오픈아카이브에서 사북항쟁 관련자 구술 하이라이트 영상을 통해 그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1980년 4월 초, 어용노조와 임금 인상 문제로 시작된 동원탄좌 노조시위는 경찰의 개입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 광부와 그 가족 6,000여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시위로 발전했다, 22일 오후 시위대와 대치하던 경찰은 사북읍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시위대는 사북읍을 장악했다. 

참여자 안원순의 구술이다. 사북항쟁 이전의 사북탄광 실태와 노조지부장 선거에 대한 증언을 통해 왜 사북항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광부들은 자치방범대를 조직해 질서를 유지했으며,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예비군 무기고와 지서 무기고 광산 화약고를 지켰다. 항쟁 지도부 역할을 한 이원갑, 신경을 중심으로 20여 명의 협상단이 꾸려졌다. 이들은 22일 오후 인근 삼척탄좌 사무소에서 정부 측 대책위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지도부였던 이원갑은 사북항쟁 당시 공수부대가 진입한다는 정보를 듣고 화약고를 점거하고 비상상황에 대비했던 절박한 순간을 증언하고 있다.

4월 24일 오전에 노사정 대표가 11개항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이재기를 비롯한 어용노조 집행부의 사퇴, 상여금 인상을 빼면 나머지 조항은 대부분 부상자 치료와 보상, 피해 주택 복구 등의 사태 수습책이었다. 합의서에 주동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들어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지도부였던 신경은  합의의 내용과는 달리 수습대책위원회를 빌미로 한 불법연행의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전두환 계엄사령부 하의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현지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뒤, 200여 명의 광부와 주민들을 연행하여 심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했고, 임산부를 포함한 40~50명의 부녀자들을 상대로 성적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이후 이원갑 등 7명은 실형을 선고받고 21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들은 석방된 뒤에도 감시대상이 되었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생계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윤병천은 사북항쟁 참여자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을 증언하고 있다. 사북항쟁 관련자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가혹했다.


사북항쟁은 2005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았고,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사북항쟁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권고했다. 그러나 고문을 당한 피해자, 특히 여성피해자들에 대한 치료와 보상은 아직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장산 사택단지 B지구 부인회장이었던 이명득은 보안사에서 고문당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