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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의 증언

1980년 12월 9일 밤,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황금동 소재 미국문화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건물의 지붕에서 일어났는데 신속하게 진화되었다. 경찰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고 언론에 알렸고 그렇게 보도되었다. 발화의 원인이 전기누전에 있다고 말해지기도 했으나, 경찰은 방화를 인지하고 내사에 들어갔다. 이 사건의 직접적 관련자는 총 5명으로 김동혁, 정순철, 임종수, 윤종형, 박시영이었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전남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종수를 12월 10일 별건의 시위기도 배후로 보고 연행하여 조사했다. 얼마 후 동부경찰서로부터 임종수가 방화 관련자라는 정보를 듣고 폭력을 동반한 취조가 이루어졌다. 임종수는 연행 3일째 되던 날 전모를 밝혔다. 경찰은 김동혁을 연행하고 이어서 박시영을 체포했지만 나머지 2명은 도피하여 사건을 종결했다.


"그때 사람들 공포가 엄청 컸어요, 저도 그렇고. 근데 계엄군들은 사람을 저렇게 엄청나 하고, 그걸 본 사람들이 두려움이 굉장히 많았어요. 피난 간 사람들도 많았다니까요. 근데 그때 도청 앞에서 막~ 환호성을 했어요. 대자보 붙이면서 미 제7함대가 우리를 구하러 온다. 며칠만 더 버티면, 인자 우리는 살 수 있다. 전두환은 응징하고 미군이 우리를 직접 보호하러 온다. 그래가지고 사람들이 대자보 붙이니까, 박수치고 만세하고 그랬어요. 거기서. 저도 이제 ‘드디어 이제 미국이 우리를 구하러 오는구나!’ 해가지고 굉장히 ‘살았다!’, ‘이제 살았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다 했지요. 근데 5·18 5월 27일 날 그렇게 다 진압되고 나서 그 이후에 카농 회원들 만나고, 책을 보고 하면서 미국이 결국은 우리 기대대로 우리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전두환의 학살을 방조하고 오히려 묵인하고 협조했다. 그래서 미국이 결국 우리를 죽인 거다. 이런 이야기를 막 할 때에요."

광주미문화원방화는 5‧18민주화운동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5‧18민주화운동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로,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미국 항공모함 코럴 시(Coral Sea)호가 시민을 돕기 위해 부산에 입항한 것으로 알았으나, 신군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에 분노했고, 커다란 배신감을 표출했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회원이었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3명은 1970년대부터 농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의 피바람이 휩쓸고 간 광주와 전남지역에서,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는 활발하게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단체였다.

"그니까 이제 그 이야기를 김동혁 회장이 한 거예요. ‘군 작전권이 미 8군에가 있는데, 미 8군은 UN군 UN군의 주축을 이루는 군대로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근데 우리나라는 휴전 상태이기 때문에 …’ 그때 처음 안 사항이제 그것도. ‘사항이기 때문에 군인이라고 하는 것은 상부의 작전 지시가 없을 때 총 못 쏜다. 근디 그들이 쏘았기 때문에 동조, 방조, 동의 내지는 방조했기 때문에, 광주시민을 학살한 것 아니냐? 어떻게 대한민국 군인이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할 수가 있겠냐?’ 그것도 없이, 해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그럼 언제 합니까?’ 그러니까 그때 날짜도 아마 말했을 거요. ‘12월 9일 날 하자.’ 그날 모다 그리 모여라."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실로 컸다. 이 사건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공식적으로 처음 발생한 반미운동이었다.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운동이 확산될 때마다 미국의 책임 문제가 공론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에 소재한 미문화원을 비롯해 미국 관련 시설들이 공격을 받거나 항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은 1982년 3월 18일 발생한 부산미문화원방화와 1985년 5월 23일 발생한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 등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정부는 1989년 6월 19일 국회 광주특위 질의서에 대한 답변서에서 광주에 투입된 한국군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하에 있지 않았으며,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되는 것을 몰랐고, 이들이 광주에서 전개한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했으면, 우리가 미국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라고 발표해야 될 것 아니냐고 발표해야 될 것 아니요? 그걸 안 했거든. 글고 그날 저녁에, 그냥 불이 거기 옆에 공사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못 들어가고 윤종형 형이랑 나랑 지키고 있고. 저 안에서 아~ 그랬구나! 도화선 하다가 안 되니까 석유를 해갖고 지붕을 뜯어 내갖고 뭐 부어갖고 했다는데, 불이 훅 붙어갖고 ‘불이야’ 소리가 나서 불이 붙으면 금방 소방차가 와서 꺼불드라고요. 껐다 다시 또 살아나고."

광주미문화원방화 관련자 5명 가운데 3명은 1980년 12월 26일 광주교도소로 이송되어 1981년 3월 27일 1심 선고를 받았고, 같은 해 8월 17일 2심 선고를 받았다. 2심에서 김동혁과 박시영은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임종수는 최후변론에서 방화의 정당성과 미국의 책임을 강도 높게 설파하여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1983년 6월 25일 출소했다. 임종수가 복역 중이던 1982년 3월 25일 정순철이 검거되었다. 정순철은 5년 6월을 선고받고 1983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윤종형은 정순철이 체포된 지 1여 년이 지난 1983년 4월 11일 자수했다. 윤종형은 윤공희 대주교 등의 주선으로 불구속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1984년 2월 4일 윤종형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19년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 관련자들의 구술을 수집하였다. 이 구술은 광주미문화원방화 관련자들의 사건 발발 이전의 삶과 활동, 특히  5·18민주화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체험과 활동을 규명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광주미문화원방화의 계획과 전개, 사건 이후의 삶과 활동, 그리고 사건에 대한 평가와 인식 등에 초점을 맞춰 이루어졌다. 면담 대상자는 3명으로 임종수, 윤종형, 박시영이다.

광주미문화원방화사건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다. 이번 구술의 성과는 이 사건의 배경과 전개 그리고 특성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사건의 주요 관련자 가운데 2명이 이미 사망한 상태여서 전체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이 도피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이 당국의 처벌을 받았고, 가족들이 여러모로 고초를 겪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의 과제로 남겨두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