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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사진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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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 사진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20년간의 한국 민주화운동의 기록이다. 시인이기도 한 박용수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그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활동을 많이 남겼는데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문인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민주화운동 전국조직의 크고 작은 행사가 촘촘히 기록되어 있다.

박용수 필름에는 당시 제도 언론의 관심 밖에 있던 행사나 당시에는 외부에 공개할 수 없었던 모임이 기록되어 있다. 재야단체의 발족식 같은 공개 행사나 농성, 토론회 등 내부 모임에 대한 사진은 대부분 유일한 기록들이다.

1987년 대선은 직선제로 치러졌다. 6월민주항쟁의 값진 결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였지만 대통령 후보 김대중과 대통령 후보 김영삼은 대통령의 자리를 두고 분열했다. 민통련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동시에 불러 정책세미나를 열어 범민주세력 국민후보로서의 자격을 검증했는데, 이 장면은 어떤 언론매체도 기록하지 못한 유일한 기록이다.

1978년 4월 24일 대한성공회성당에서 열린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첫번째 민족문학의 밤 행사 장면이다. 김지하가 그의 옥중수기 「고행-1974」에서 인혁당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폭로하여 구속되었다.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김지하구출위원회가 구성되어 구명운동을 펼쳤다. 이 행사는 김지하 구명운동의 일환으로 개최되었다. 수의를 입은 문익환 목사가 보인다. 수의를 입고 문인들의 행사에 참석하다니!  자세히 보면 문익환 목사의 가슴에 2개의 수번이 달려있다. 수번이 2개인 것은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었다가 인혁당사건 폭로로 다시 구속된 상황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문익환 목사의 수의 퍼포먼스가 기록되어 있는 곳은 박용수 컬렉션이다.

1988년 4월 18일, 구로구청부정투표함사건으로 구속되어 서울지법 114호 법정으로 들어가는 김병곤의 모습이다. 김병곤은 1987년 대선 투표 당일 구로구청 투표소에서 봉인되지 않은 부정투표함이 발견되어 발생한 이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재판을 받기 위해 포승줄에 묶인 채 손에는 수갑을 차고 호송버스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는 모습이다. 재판을 방청하러 온 재야인사들에게 환한 웃음을 보이고 있다. 구글검색에 나타난 김병곤의 사진은 모두 박용수의 민주화운동 기록이다.

오픈아카이브에서 유료로 서비스하는 사진사료 중 박용수의 사진은 유료 이용률이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유료 이용률이 높아야 가치가 큰 것인가? 이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내놓기는 어렵다. 위의 사례처럼 어떤 미디어도 접근하지 않았거나 하지 못했던 역사의 현장과 순간을 박용수 컬렉션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자료의 쓰임이 대표성을 부여받은 '어떤 것'에 편중되는 현상은 일반적이지만, 민주화운동 사진사료로서 유일한 기록의 지위를 가진 것이 대부분인 박용수 컬렉션이 더 많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아키비스트이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