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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고무노동자, 죽음으로 항거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않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권미경의 유서 중에서)

1991년 12월 6일 오후 4시 8분경 한 노동자가 회사 건물 옥상 난간에서 몸을 던졌다. 인근 고신의료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후였다. 왼팔에는 위와 같은 글을 새겨놓았다. 유서가 사라질 것에 대비한 것이다. 그는 스물 세살의 권미경이다.

권미경이 근무하던 (주)대봉은 부산 사하구 신평동에 위치한 신발 제조 업체로, 아디다스 등의 신발을 제조하여 수출하는 대규모 회사였다. 그러나 1991년 하반기 국내 신발산업은 수출 부진, 원화 절상, 제조비 상승 등에 따른 원가 압박 등으로 경영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주)대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사측은 어용노조의 협조하에 강제 연장근로 등을 시키고 작업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반장, 계장 등 관리직 사원들이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과 함께 강제적인 잔업을 시키기도 했다. 또한 노동자들을 이름이 아니라 '권공순', '김공돌' 등으로 부르며 비인간적으로 대했다. 권미경의 유서에 등장하는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외침은 이에 대한 저항이었다.

권미경은 야간학교 학생이던 동료 최미숙이 불량품을 내자 관리자뿐만 아니라 같은 동료끼리 꾸짖는 장면을 목격했고, 이러한 상황을 야기하는 비인간적이고 살인적인 노동현실에 항거하여 투신하였다.

권미경의 죽음이 알려진 후 부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등 부산지역 11개 단체는 “고무노동자 고 권미경양 사인규명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권미경의 죽음에 대해 "경제위기의 원인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며 '원가 절감', '결근 방지', '30분 더 일하기' 등으로 되돌려지는 이 모순된 현실이 빚어낸 명백한 타살"이라고 규정하였다.

인간다운 삶

"내가 원하는 것은 임금 인상도 아니고 편안한 일자리도 아니다. 물론 나도 인간인 이상 돈을 많이 받고 일을 보다 쉬게 하게 되면 좋겠지만 그걸 위해 투쟁, 항의, 쟁취 이런것들을 하고 싶진 않다. 적어도 인간다운 삶을 부르짖기 보다는 어떻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수 있을까 하고 개개인적으로 생각하고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안목부터 길러야 한다"

(권미경의 일기 중에서)

권미경은 단지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쓴 일기에 그의 작은 소망이 나타난다.

권미경의 장례식은 12월 22일 부산노동자장으로 치러졌고, 양산 솥발산 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