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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보는 김수환 추기경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으로 한국 사회는 큰 슬픔에 휩싸였다.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동시에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온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길에는 현직 대통령부터 종교를 뛰어넘어 수많은 인사들이 함께했다. 김 추기경의 장례미사에는 40만명에 가까운 국민이 조문을 하면서 추기경의 떠남을 아쉬워했다.
1922년에 태어난 김수환 추기경은 일제강점기, 광복을 거쳐 민주화를 이루기까지 질곡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삶을 보내며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정치와 사회가 균형을 잃고 정의가 위협받을 때는 참된 정신의 상징으로, 갈등과 이기가 극단으로 치달을 때는 시대의 스승으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소리 없는 자의 소리가 되어준 큰 어른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기록으로 살펴보자.
동양 최초, 최연소 추기경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 134명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추기경은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로 굉장히 영예로운 자리이다. 김 추기경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고,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서임식에서 김 추기경은 서임자 중 최연소의 나이(47세)였다.
독재에 맞서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천주교는 정면으로 유신을 비판하며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출범하면서 교회의 현실 참여문제로 내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여러 사제들이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는 등 정권의 탄압이 이어지면서 교회와 박정희 정권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엄혹한 이 시기에도 김 추기경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의 현실참여는 옳은 방향이라고 판단해 불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박정희정권은 유신체제가 들어서기 직전인 1971년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선언'을 하고, 대통령에게 비상사태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는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 자정 미사에서 박정희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정부와 여당에게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 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평전)
시대의 한복판에서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명동성당은 1980년대에도 해방구이자 각종 시국 미사들이 집전되는 곳이었다. 특히 1987년 1월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던 5.18 7주기 추모미사가 거행되었고, 6월항쟁 때는 농성단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경찰이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연행하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려고 하자 김추기경이 이를 끝까지 막아내며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은 유명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이들의 벗
김 추기경의 약자에 대한 관심은 철거민, 이주노동자, 미혼모 등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또한 일본 정부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반인륜적, 반도덕적 행위에 대한 사죄를 촉구하고, 배상이 아닌 위로금 지급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과거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죄에 대해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해야 합니다(...)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구체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범죄가 다시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사업을 계속 실시해 나가야 할것입니다.그것이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범죄국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이며, 전쟁범죄에 대해 반성하고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질 줄 아는 국가라는 인식을 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1995년 1월 10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보내는 서한 중)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한,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종교인의 양심으로 올바른 길을 제시해온 김 추기경의 삶은 그를 기억하는 모두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