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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광주를 기록한 월요모임의 사실보고서(Fact Sheet)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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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초,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묵살한 신군부는 5월 광주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했다. 항쟁기간인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계엄군에 의해 수많은 시민들이 숨지고, 실종되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봉쇄하고 보도 통제를 통해 광주의 상황이 외부로 나가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내외 기자들은 광주의 참상을 취재하려고 광주를 방문했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주인공인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를 비롯하여 당시 UPI 소속으로 광주를 취재한 정태원 기자까지 많은 외신 기자들이 현장의 기록을 남겼다.

이들 기자 외에도 광주의 진실을 외국에 알리려 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월요모임(Monday Night Group)이었다. 월요모임은 한국에 거주하고 있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모여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사실보고서(팩트 시트, Fact Sheet)를 작성했다. 

사실보고서는 월요모임의 구성원들이 미 대사관 관계자, 정부기관의 관계자, 혹은 외신기자들에게 수집한 한국에 대한 정보, 해외통신 및 저널 그리고 한국에서 발행한 성명서, 유인물, 사건 당사자나 구속자 가족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작성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보고서는 필요에 따라 한국에서 발행된 성명서, 탄원서 호소문과 신문기사를 번역하여 함께 묶음으로써 하나의 보고서가 완성되었다.

이런 문서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월요모임 구성원들이 직접 운반하거나, 선교사, 기자, 사업가들의 여행가방, 미군 우편 등을 통해 일본과 미국 등 한국을 지원할 수 있는 교회 관계자들이나 외국의 저널리스트들에게 전달되어 전세계에 배포되었다. 

사실보고서는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약 9년간에 걸쳐 발행되었다. 첫번째 보고서는 1973년 박형규 목사의 투옥에 관련된 내용으로 발행되었고, 1981년 63번째 보고서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다. 

월요모임의 사실보고서(Fact Sheet) #59는 5·18민주화운동의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프래드 베일리스(Fred M. Bayliss)가 현지 목격자 증언을 날짜순으로 편집하여 작성한 보고서로 5·18민주화운동 기간의 참혹함을 담고 있다. 

Korea Fact Sheet #59

But in the afternoon of the 18th 4 truck loads of paratroopers arrived an advanced on the students. Students were beaten, trampled and captured. Those captured were stripped and their hands tied behind their heads with clothing, female and male alike, and forced onto trucks, Some of the women were completely naked so a bystander removed her own underwear and tried to give it to a student but was severely beaten for her trouble.

The students were taken from the truck, forced to lie head to feet in rows on the ground and made to roll to and fro, naked and with hands still firmly tied behind their heads. Some of the injured were taken to the hospital by students or citizens but paratroopers came and removed them saying, "We have our own hospitals.


그러나 18일 오후 공수부대를 실은 4대의 트럭이 학생들에게 진군했다. 학생들은 구타당하고 짓밟히고 잡혔다. 붙잡힌 사람들은 옷을 벗기고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려 옷으로 묶인 채 남녀구분없이 강제로 트럭에 태워졌는데, 일부 여성은 완전히 벌거벗었기 때문에 행인들이 자신의 속옷을 벗어주려했지만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심하게 맞았다. 

학생들은 트럭에서 강제로 내려져 바닥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줄지어 누워있었고 벌거벗겨진 채로 두 손을 머리 뒤로 단단히 묶은채 이리 저리 굴려졌다. 부상자 중 일부는 시민과 학생들에 의해 옮겨졌으나, 공수부대는 "우리도 병원이 있다"며 그들의 행동을 제지했다.

18일자 광주 시위  증언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진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학생들을 구타한 것도 모자라 나체로 만들어 성적 수치심을 일으켰고, 이 학생들을 지원해주려던 시민들까지 구타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항쟁 초기부터 시위진압이 해산이 아닌 체포위주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제11공수여단 김 모 하사는 2006년 9월 6일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에게 "시위진압이 처음부터 해산 위주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되었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편, 2007, 65쪽)

사실보고서에는 21일 상황도 기록되어있다. 

May 21st was a holiday an 500,000 people came onto the streets. At 12:56 the soldiers began firing and the city became a sea of blood. It was then, and only then that the students went to a nearby town to pick up guns stored there and returned to the conflict. To that time no police boxes had been damaged.

During that afternoon a 'woman, 7 months pregnant, went in search of her husband who had not returned. Sometime later he found his wife dead from a bullet wound.


휴일이었던 5월 21일  500,000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12시 56분 군인은 사격을 시작했으며 도시는 피바다가 되었다.  그제서야 학생들은 근처 지역으로 가서 총기를 가지고 무장해서 돌아왔다. 그 때까지 파출소는 공격받지 않았다.

그날 오후, 임신 7개월차 여성이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 그후 남편은 총상으로 죽은 아내의 시신을 발견했다. 

이 뿐만 아니라 사실보고서에는 30일 서울에서 있었던 김의기 열사의 죽음도 기록되어있다. 

Back in Seoul on May 30th, staff in the Christian Building noted a number of pamphlets and then a person falling past their windows. A young man, the Head of the Rural Committee of the Ecumenical Youth Council, had written a challenging note to his countrymen and then committed suicide in protest over the actions of the military in Kwangju. His family were faithful Methodists.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의 직원들은 많은 팸플릿과 창문 너머로 떨어진 한 사람을 발견했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농촌위원회 위원장이었던 한 청년이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을 쓴 후 광주에서 군의 행동에 항의하여 자살하였다. 그의 가족은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이처럼 사실보고서는 5·18민주화운동의 사실들을  정리하고 기록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삼엄한 군사 통제 중인 광주에 잠입, 취재해서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기자들, 그리고 월요모임과 같은 단체가 있었기에 전세계에 광주의 참상을 알리게 되었고 국제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