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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사진전과 개인 기록물
5·18민주화운동 42주년, 6·10민주항쟁 35주년을 맞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주관하는 사진전 ⟪그들이 남긴 메시지: 억압 속에 눌린 셔터⟫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고 있다.(2022.05.03 - 07.26)
⟪그들이 남긴 메시지: 억압 속에 눌린 셔터⟫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나경택, 조성호, 노먼 소프 같은 내외신 기자는 물론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이었던 김양배, 노규백과 광주기독병원 의사였던 조상기 등 일반인이 촬영한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광주 시민을 향한 계엄군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폭력과 만행은 그들이 셔터를 누르게 한 가장 직접적인 동인이었다. 더불어 신군부의 언론통제로 광주의 급박한 상황이 도시 밖으로 즉각 전달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 대한 위기감과 분노도 컸다. 기록하기를 업으로 삼는 기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 역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카메라를 들이밀고 펜을 들어 기록을 남기고 전달해야 한다는 의지가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남긴 메시지: 억압 속에 눌린 셔터⟫에서는 사진뿐 아니라 당시 보고 들은 상황을 적은 일기장과 메모 등 개인 기록물들도 함께 전시되어 무차별적 폭력과 맞닥뜨린 광주 시민의 당혹감과 고통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보도통제지침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언론보도 상황
계엄 당국은 ‘5.17 계엄지역확대조치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지침’에 의거해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일체의 보도 내용을 검열하고 삭제했다. 보도검열 통제지침은 ‘현 체제와 정부를 비방’하거나, ‘북괴 또는 북괴지지단체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 발표되지 않은 ‘군 관계 사항’ 등 국가안보 관련 사항과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대한 비판’, 국가 ‘경제질서를 혼란’시키거나 불안감을 조성하는 내용 등 공공질서 유관 사항 등을 보도불가 사안으로 지정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타로 삭제·검열된 부분을 공백으로 놓아두거나 돌출 광고를 하지 말 것까지 지시하고 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결재한 이 문건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국내 언론은 항쟁의 실제와 계엄군의 만행을 보도하지 못하였으며 계엄 당국의 발표만을 지면에 싣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신문보도 내용은 대체로 진상을 왜곡하거나 보도했을 때 당국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법한 사실만을 담고 있다. 계엄군은 실제로 18일부터 광주에 모습을 드러내 시민들을 폭행하기 시작했으나, 27일 동아일보는 사태 발생 10일 만에 계엄군 투입이 개시되어 도청을 비롯한 주요 건물을 장악하였다고 보도했다. 리영희 선생이 스크랩한 신문 기사는 광주 시위를 선동한 간첩을 검거했다는 소식, 연합사 소속 한국군의 광주 진압 동원 요청에 주한미군 사령관이 동의했다는 소식도 포함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의 국정원 평가 및 육·해군의 기록 등 조사 결과 근거 없음으로, 후자의 경우 1980년 주한미대사관이 미국무부에 보낸 비밀전문을 통해 미국이 병력 배치를 고려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뒤늦게 광주로부터 도착한 기록과 사진
항쟁이 종료된 후에도 신군부는 5.18의 진상이 확산되는 것을 철저히 막으려 했다. 이런 상황 속에 항쟁 기간동안 광주 시민들은 각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기록을 남겼다. 개인이 만든 기록은 항쟁 기간 벌어진 참상과 왜곡된 사실들을 바로잡고 전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이 로사리아(이성애)는 광주의 진실이 제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기억되기를 바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을 유인물로 제작했다. 이 로사리아의 기록은 전남대학교에서 발생한 계엄철폐 시위와 군인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한 항쟁의 발생부터 입에 담기 어려운 수준으로 잔인해지는 계엄군의 폭력행위와 대항하는 시민들을 모습, 항쟁 전개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광주시민은 이 비극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광주 사태는 비상계엄 하의 언론통제로 철저히 진실이 왜곡되어 어떤 경우에는 사실이 정반대로 전달되고 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영원히 역사에 새겨질 것이다 … 이 보고는 극히 한정된 상황을 사실에 입각하여 기록한 것이다 … ”
“… 공수특전단 소속 군인들은 이날 오후 4-5시경 군인트럭을 타고 시내 중심가에 들어와 데모학생들을 M16 개머리판과 방망이로 무차별 구타하여 연행했다. 군인들은 학생들이 피흘리며 쓰러지면 구둣발로 짓이긴 후 군인트럭에 집어 던진후 머리를 수그리게해서 굴비를 쌓아놓은 것처럼 포개놓았다. 시민들은 이 광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느 청년이 제일은행 뒷건물 옥상에서 군인들에게 돌을 던지자 군인들은 그 건물의 옥상으로 쳐들어가 10여명을 붙잡아 난타하는 모습도 보였다. 군인들이 남녀노소를 묻지않고 구타하며 칼로 찔러댔다. 온통 피비린내가 광주 도심지에 깔리기 시작했다.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현기증이 들었다. 나는 카톨릭센터 앞에서 먹은 것을 토했다.”
“… 도청구내에 있는 1층 건물 안에 널이 20여개 놓여있었다. 시체들은 얼굴만 내보여진 상태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고등학교 10여명이 계엄군에 의해 숨진 동료학생의 시체를 운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도청에서부터 분향소가 마련된 상무관까지 50여미터 가량을 행진했다.”
항쟁 당시 광주에서 빠져나가지 못했던 각종 사진과 기록들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목소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1984년 유화국면 이후부터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오픈아카이브에서도 1980년대 시민사회에서 생산한 다양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집을 열람할 수 있다. 자료집은 사진, 신문 기사, 증언록, 성명서 등을 묶은 책자 형태로 발간되었다. 그중에서도 천주교회는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을 했다. 여러 종류의 5·18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을 생산하고 자료집을 발간했을 뿐 아니라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천주교광주대교구정의평화위원회가 1987년에 펴낸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은 광주에서만 10만 부 이상이 제작되었고 전국적으로도 배포되었다. 사진집에 대한 수요가 급증해 복제품이 등장할 정도였다. 당국의 보도 제한으로 5·18민주화운동 관련 시각 정보를 접할 길이 없었던 시민들은 기존 정부의 공식 입장과 대치되는 끔찍했던 광주의 상황에 크게 충격을 받았다.
뒤늦게 광주로부터 도착한 기록들은 전국 각지 시민들에게 광주에서 벌어진 참상을 알렸다. 사람들은 광주 시민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했고,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데 대한 부채감도 느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공감대를 바탕으로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에 대한 추모와 기념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가 제기되었다. 지금까지 1988년 국회 청문회, 1995년 검찰 수사,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광주 진상규명 조사 등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최초 발포명령자, 집단학살, 암매장 등 많은 의혹이 아직 남아 있고, 현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진행 중이다.
참조:
정호기, 2013,「천주교회의 ’5월운동‘과 사회참여: 1980년대 전남지역의 활동을 중심으로」,『神學展望』
서중석, 2012, 「광주항쟁과 천주교회의 진실 알리기」,『神學展望』
5.18 기념재단 (https://518.org/)
5.18 민주화운동기록관 (https://www.518archive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