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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가협 활동을 기억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은 2002년부터 민주화운동 참여자의 기억을 채록하는 구술사료 수집사업을 해오고 있다. 사료관 수집 구술사료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종교운동, 여성운동 등 다양한 민주화운동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현재 1980년대 민주화운동 구술채록 5차년도 사업이 진행중이다.

사료관은 2021년 1980년대 가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이하 민가협) 설립과 활동에 참여했던 10인의 구술을 채록했다. 구술자들은 1985년 창립 시기부터 1990년대 중반에 결합한 회원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분들은 대체로 자녀나 배우자의 구속으로 민가협 회원이 되어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민가협의 실무를 수행했던 총무와 간사들의 구술도 채록했다. 


1

김성한

1992년부터 민가협 활동, 1993년과 1995년 민가협 부회장 

2

김정숙 

1989년부터 민가협 활동, 1992년과 1998년 민가협 상임의장 

3

남규선

1989년 민가협 회원으로 시작, 1990년 상근 간사,

1992~1998 민가협 총무

4

유시춘

1985년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결성 및 총무 활동,

민가협 창립 주도 

이소남 

1985년부터 민가협 활동, 창립회원 

이영 

1988년부터 민가협 활동, 2002~2006 민가협 부회장,

2006~2009 민가협 상임의장 

인재근 

 1985년 민가협 창립 주도, 초대 총무

정순녀 

1987년부터 민가협 활동 

9

조무하 

 1988년 민가협 총무

10

조순덕 

1996년부터 민가협 활동, 2002~2005 민가협 상임의장

2010~현재  민가협 상임의장

민가협 활동을 기억하고 이야기하다

가족의 수감을 계기로 민가협 활동을 시작했던 구술자들은 가족의 석방 이후에도 민가협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대부분 구술자들은 활동 계기가 되었던 가족보다 오히려 더 오랜 시간 인권운동에 투신한 셈이 되었다. 구술 사료를 통해 구술자들이 민가협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 안기부나 구치소 항의 시위, 양심수 및 장기수 석방 캠페인 참여 경험 등에 대한 개인적, 집단적 기억은 물론 민가협 창립과정과 '목요집회',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민주가족> 발행 등 민가협 주요 활동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오픈아카이브에서는 구술 하이라이트 영상을 공개하고 있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방문을 통해 구술 녹취록을 열람할 수 있다.

두 차례 민가협 상임의장직을 맡았던 김정숙 씨는 이근안 재판과 103일 안기부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고초를 겪었던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근안이 저 재판하는 데 가서 이근안이 그 재판장에 들어간 데를 막고 있으니까 못 들어가고 우리는 어디로 갔는지 몰랐는데, 어디 지하로 어디로 가서 들어갔다 하더라고요. 거기 가서 뭘 갖다 땡기고[던지고] 뭐 계란도 땡기고 막 뭔 물병도 땡기고 막...


그 103일 동안을 안기부 가서 저녁에는 들어가고 낮에는 나오고 그래서 거기서 진짜 고생을 했어요... 그 안기부에 올라갈라면 이렇게 경찰들이 싹 요렇게 막고 뒤에는 좀 늙은 놈들이 서고 젊은 애들 세우고 그러잖아요. 아니 근데 내가 뒤어서 보니까는 이 최은하(민가협 회원)가 얼른 뛰어서 넘을라고, 넘을라고 하다 못 넘더라고요. 아 그러니까 이제 밑으로 들어갈려고 이렇게 하니까는 어떤 경찰이 어떤 놈인지 머리를 막 끌고 들어가는데 내 느낌에 머리가 쏙 빠져머릴 것 같아... 아 그런데 은하를 뺐다가 이놈이 나를 (워커발로) 차븐거여. 너를 떨어져라 식이었죠. 그래갖고 내가 저것내로 뚝 떨어져 갖고 기절을 해브러서 병원에까지 실어가도 몰랐다니까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의 탄생과 활동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는 국가폭력피해자, 장기수, 노동자, 대학생 등을 망라하는 가장 광범위한 구성원을 가지고 있는 가족운동 조직이다. 가족운동의 맹아라 일컬어지는 구속자가족협의회(이하 구가협)가 민가협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구가협은 1974년 민청학련,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인한 구속자 수 증가와 목요기도회 등의 영향으로 설립되었다. 구가협은 이어 한국양심범가족협의회로 재편되었는데, 1985년 미문화원 농성 사건, 구로동맹파업, 민청련 사건과 관련하여 비슷한 시기 각기 투쟁하던 가족들이 서로 격려하고 뭉치게 되었고, 가족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통합조직으로서 민가협이 설립되었다.


1985년 민가협 출범 이후 7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와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등 종교 관련 단체 중심이었던 인권운동이 확장되었다. 민가협은 인권변호사 분배 선임, 옥바라지 등 구속된 가족을 지지하는 활동에서, 가족과 얽혀있는 사건을 비롯해 구치소와 교도소 내 폭력, 장기수, 조작간첩사건, 고문철폐 등 인권 영역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민가협은 용공사건, 간첩단 사건 등 1970년대만 해도 사상범이라는 이유로 소외되었던 구속자와 구속자 가족을 받아들였다. 양심수후원회라는 별도의 기구를 만들어 이들을 지원하고 석방 캠페인을 벌이고, 양심수 실태에 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침해하는 장기수와 양심수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89년에 발간된 다음의 보고서는 장기복역 양심수의 대표적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민가협에서 파악한 바로는 재미교포, 일본이나 3국을 방문했다가 북한인을 만난 적이 있는 사람, 조업 중 납북되었었던 사람 등이 공안사범으로 장기복역하고 있었다. 

민가협은 공안 사범이 고문 등 폭력으로 조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신념과 사상만을 이유로 사람을 장기 수감하는 것은 비인도적, 비민주적 처사라는 점을 각각 지적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례 대부분은 2000년대 이후 재심을 통해 무죄 및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보고서 초두에 소개하고 있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경우 관련자는 2021년 재심을 통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재일동포 이헌치 씨는 2012년, 김순일 씨는 2015년 재심에서 각각 무죄임이 밝혀졌다. 이외에도 진도고정간첩단사건 관련자, 납북어부 이병규 씨 등도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와 국가배상 판결을 받았다. 

이른바 장기복역 양심수라는 공안사범의 숫자는 현재 260여 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이 조작된 간첩의 경우, 구속과정에서 극심한 고문이 수반되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일단 간첩으로 조작되면 이들에게 남는 희망은 무엇일까?... 장기복역 양심수 중 10년 이상 복역자는 반수를 넘는 190명이며, 20년 이상 복역자가 60~80명이나 된다. 또 30년 이상 복역한 사람도 50여 명에 이른다. 일반 형사범의 경우 무기수라 해도 15~16년 복역하면 석방되는 것이 통례인데, 단지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사상만을 이유로 20년 이상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법률 운용의 형편에도 어긋난다.(장기복역 양심수의 실태 보고서 3쪽 내용 일부)


민가협은 수감된 자신의 가족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시작,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던 가족까지 끌어안았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에 반하는 법을 철폐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들의 활동은 대한민국이 1995년 유엔 고문방지협약에 가입하고, 1989년 사회안전법, 1998년 전향제도, 2003년 준법서약서가 폐지되는 데 기여했다.

참조:
김설이이경은, 잿빛시대 보랏빛 고운 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49통일평화재단, 「1980년대 가족운동 구술채록 결과보고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