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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시로 보는 탄광촌

탄광촌의 이미지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다. 1960년~1970년 경제개발 시기에 석탄채굴 사업을 진행하며 황금기를 맞이하였던 탄광촌의 모습을 비유한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탄광촌의 삶은 풍요롭지 않았다.

1969년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원주교구연합회에서 조사한 광산노동자 실태조사를 살펴보면 임시종업원이 8,000원~10,000원 그리고 정식 종업원이 12,000원~15,000원 임금을 받고 있었다. 또한 1970년 직종별 임금 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채탄부(남)의 평균임금은 18,910원, 채광부(남)의 14,680원, 채석부(남)의 10,890원이다. 그러나 동종업계 사무직(남)의 경우 평균 33,252원, 교환수(여) 21,009원, 판매조사자(남)19,000원에 비하면 실제 현장의 광부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 실태였다.


또한 광산 노동자의 임금은 표면적으로는 동종 업계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탄광 채굴의 대다수가 강원도처럼 고지대 또는 산골지역이었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높은 임금이라 보기 어렵다. 1971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석공(石公)의 월급을 22.8% 인상한다고 했으나 실제 물가 오름세에 비하면 ‘쌀 두 가마 들여놓으면 꼼짝할 수 없을 정도’라고 표현할 만큼 탄광촌의 물가는 높은 편이었다. 실제 광산 노동자의 지출 명세를 보면 식료품의 지출이 46%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는데 이는 사북항쟁이 일어난 1980년도에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사북·고한 역사연구 「탄광촌의 삶과 애환」에 따르면 1980년도 당시 광산 노동자의 임금은 평균 15만 5천 원으로, 1980년도 광산노련에서 집계한 최저생계비인 24만 원의 64% 정도에 불과했다.


아이들 눈에 비친 탄광촌


아버지 월급


우리아버지 월급은

10만원이 넘지요

그러나 항상 우리집은

돈이 모자라지요

월부장수


월부장수가 와서

돈도 없는 엄마한테

막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머 사라고 하면

나는 그사람 물건을

하나도 사주고 싶지 않다.

이런 탄광촌의 현실은 아이들의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시에서 나타난 탄광촌의 모습은 화이부실(華而不實)이었다. 시 「아버지 월급」에서는 월급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듯 아이는 아버지의 월급이 10만 원이 넘지만 우리집은 돈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 「월부장수」에서는 돈 없는 현실에서 사모님이라는 호칭을 통해서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탄광촌 이미지가 실제와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