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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만
사업개요
- 1978년 고려대 9.14시위
-
1972년 이후 박정희 유신 정부가 들어선 이후, 특히 1975년 5월 13일 긴급 조치 9호 선포 이후 정부 차원의 억압과 감시는 강화된 반면 반정부 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률로 볼 때 박정희 정부의 미래는 전도양양해 보였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보한 것으로, 체제 변경의 요구는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생들의 시위는 1977년 가을 학기부터, 특히 1978년 여름을 경과하면서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1978년은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가 실시된 해이자 3대 스캔들一현대아파트 특별분양사건, 교사 자격증 매매 공무원 부정사건, 공화당 국회의원 성낙현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혐의 구속사건一의 해이며 또 긴급조치9호의 공포에서 벗어나 민주화운동세력의 저항이 본격화된 해이기도 했다. 특히 대통령 선거가 지나고 2학기 개학이 되자 대학생들의 저항은 시위의 형태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1978년 9.14 고려대 시위사건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천상만
- 면담자
- 조현연
- 구술일자
- 2008. 10. 1.
- 구술장소
- 한국생산성본부
- 구술시간
- 1시간 45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고려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 중앙성결교회 협동목사
한국생산성본부 전임교수
기독경영연구원 운영위원
- 구술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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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만은 1978년 4월쯤 기독교학생회 활동을 같이 해 온 친구와 학내시위를 준비하게 된다. 9월 13일 시위를 결행할 생각으로 9월 12일 남대문 시장에서 가리방과 먹지, 종이를 구입하여 정명기 전도사와 강명순 사모가 목회활동을 하던 사당동 희망교회에서 가리방을 긁어 유인물 <78민중선언>을 만들었다.
그 후 새문안교회 대학부가 운영하던 구로동 야학방으로 가 밤을 새우고 다음 날인 9월 13일 학교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9월 13일 수돗물이 흘러나와 새벽 야학방 바닥 전체에 물이 흥건히 고여 애써 작성한 유인물 뭉치가 물에 완전히 젖어 D-day를 하루 연기하였다. 천상만은 이에 대해 이렇게 구술하고 있다. “(중략) 저는 이게 아주 기억에 남아 있는데, 왜 그때 수돗물이 흘러나왔을까, 왜 수돗물을 안 잠갔을까.(중략)"
9월 14일 아침 고려대에 도착한 뒤 천상만, 이혜자, 오상석 3명은 각각 맡은 장소로 향하였다. 천상만은 본관 건물, 이혜자는 서관 건물, 오상석은 교양학부 건물 등을 맡았다. “강당으로 모이라!”는 소리를 지르며 유인물을 뿌리고, 분위기는 고조되면서 ‘나가자, 폭풍같이’라는 고려대 응원가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천상만은 수백 명이 모여든 강당에서 유인물인 <78민중선언>을 낭독했고, 이어 건물 밖으로 나가 스크럼을 짜고 ‘유신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며 달렸다. 경찰병력이 들어오고 기관원이 상주하던 정문 수위실이 불타기도 했다. 결국 많은 학생들이 연행되었고 9·14 시위는 막을 내렸다.
천상만은 다음날 자진 출두하는 형식으로 성북경찰서로 들어가 조사를 받은 후 공안 검사한테도 조사받고 구속되었다. 9월말 서대문구치소로 넘겨져 독방생활을 했고 또 데모를 하다가 고문을 당했다. 전주교도소 정치범 사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다가 다음해인 1979년 8·15 특사로 풀려나왔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