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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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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채록 정보

구술자
이신범
면담자
신동호
구술일자
2019. 8. 2
구술장소
현대사기록연구원
구술시간
147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서울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구술자 이력

- 《자유의 종》 발행인

-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대변인

-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지부 근무

-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구술내용 요약

이신범은 6.8부정선거규탄대회 때 처음으로 시위를 경험했다. 그 뒤 사회법학회 활동과 학생회 총무부 차장, 반공법위반사건으로 구속되는 등의 이력이 쌓이면서 사찰기관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각인되었다. 장기표 등 법대 운동권에서 만들어 배포한 《자유의 종》은 각 대학으로 파급돼 지하신문 붐을 일으켰고, 동아일보 등의 자유언론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신법은 잦은 무기정학과 휴학으로 1971년까지 학업이 연장되었다. 

1971년 교련철폐투쟁은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3개대 학생회를 운동권이 장악하고 각 대학 이념서클이 참여한 한일문제토론회 등을 통해 대학 간 연대가 이루어진 바탕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조직화된 것이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이었다. 

4.27대통령선거에서 공명선거감시운동, 5.25국회의원선거 거부운동은 후진국사회연구회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지도부가 모두 제적되어 조직이 와해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통전국학생연맹으로 재조직이 시도되었으나  또 다시 지도부가 수배되면서 정식 출범식을 치르지 못하고 위수령사태를 맞았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도 학생시위사태를 대통령선거에서 겨뤘던 김대중과 연계시키려고 내란사건을 조작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이신범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끝내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서울대생내란음모사건으로 4명을 기소하는 데 그쳤다.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 창립 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