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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노
사업개요
- 고려대 민우지 사건
- ‘유신 전기 민주화운동 역사정리사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이번 구술 채록은 1972년 고려대 ‘민우지사건’, ‘민청학련 사건’, ‘자유언론실천운동’ 등 세 가지 주요 사건을 기록했다. 고려대 '민우지사건' 구술은 사건의 실체, 조직의 발각, 재판과정 등을 파악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구술자는 윤경노, 함상근이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윤경노
- 면담자
- 배병욱
- 구술일자
- 2021.9.14.
- 구술장소
- 서울시 송파구 회의실
- 구술시간
- 128분
구술컬렉션 > 1970년대 학생운동 > 고려대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67-1970 서울 성동고등학교 졸업. 1969년 삼선개헌 반대 주도하여 무기정학당함(고교 생활기록부 출결란에 사고 5일, 질병 11일로 기록)
1971-1976.9 고려대학교 문과대 사학과 졸업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 부정선거 감시와 공명선거 추진을 위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선거참관인으로 경남 남해 방문)
1973.4-1974.2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음모죄 등으로 서울구치소 수감
1976.5-1977.1 해군본부 방위 근무
1977.3-1977.8 서울 선일여자중학교 역사교사
1977.9-1978.2 진영정밀산업주식회사 노무관리 담당
1978.3-1979.2 서울 대광고등학교 역사교사
1979.3-1980.9 제10대 국회부의장 고흥문 의원 3급갑 비서관 역임
1981.3-2014.2 서울 선화예술중·고등학교 역사교사, 연구부장, 교감, 교장 역임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음모죄 등으로 수형자 중 최초 중등교사, 교장 임용됨.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는 1952년 경북 예천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제 때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할 만큼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했고, 자유당 시절에도 야당 성향이었다. 부친은 상업학교를 나와 금융조합에서 근무하였고, 삼촌이나 이모부 등 집안에 명치대학이나 보성전문 출신의 지식인이 많았다. 이러한 가풍 탓에 구술자는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현실 정치에 비판적이었다.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넉넉한 형편의 중소지주였다.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닌 구술자는 고3 때 3선개헌반대운동을 주도하여 전국에서 무기정학 당한 고교생 2인 중 1명이었다. 그는 고대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높이 평가하여 지원했으며, 정치인이 되고자 하여 사학과를 택했다. 대학 입학 후 교련반대투쟁에 적극 가담하였고, 한맥 활동과는 별도로 김대중 대통령 후보 측 공명선거 참관인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 한맥의 일원으로는 광주대단지사건 현장 조사와 노동문제연구소의 근로자 이동 실태조사 등에도 참여하였다.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 사태로 이념서클 한맥은 해체되었고, 구술자를 포함한 한맥 1학년들에게는 조직이 없는 상태에서 조직 활동, 학생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놓였다. 구술자를 포함하여 정발기, 박영환, 최기영 등 71학번은 선배 박세희(70), 정진영(69)과 함께 민족주의·휴머니즘이라는 한맥의 정신을 계승할 운동단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한맥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다 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이에 맞서는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1972∼73년 유신반대 시위의 첫 테이프를 끊은 고려대 ‘민우지사건’은 이들 한맥 71학번이 중심이 되어 실행한 ‘유신찬양현수막소각사건’과 소식지 《민우》지 발행 등 2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구술자는 이 2개의 사건 중 주로 전자와 관련되어 있고, 후자에는 유인물의 배포에 조력하였다. 전자의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한 인물은 정진영(사학 69)이며, 구술자는 망을 보고 그의 도주를 도왔다.
유신에 반대해 벌인 거사였으나,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조사하면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의 김낙중과 연결시켜 ‘NH그룹 학원침투 간첩단사건’을 조작했다. 흥국탄광의 노동 체험 활동 등을 근거로 기존 사회를 부정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잘사는 ‘새로운 사회주의체제’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술자는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김낙중과의 인연도 깊지 않으며, ‘NH회’를 결성한 적도, 그러한 명칭을 사용한 적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조작이었다.
‘민우지사건’으로 10개월의 형을 살고 석방된 구술자는 신원조회로 인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는 등 인생의 행로가 크게 바뀌었다. 비록 예상치 못했던 교육계에 평생 종사하게 되었지만, 보람된 일이었다 생각하고, 유신체제 종식에 초석이 되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일조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1972년 12월 2일 정진영·박영환과 구술자가 만나 거사를 계획하고, 4일 1시 실행한 과정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