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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원
사업개요
- 민주화운동 주요인사
- 2021년 ‘민주화운동 주요 인사' 구술 수집 사업은 전 UPI 및 로이터통신 사진기자인 정태원의 생애사를 채록했다. 이번 채록은 1970~1990년대 민주화운동 현장을 취재하며 방대한 사진 기록을 생산한 원로의 경험을 통해 시각 사료의 역사적 가치를 고도화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구술자의 성장 과정과 사진기자로서의 활동사는 물론, 특정 사건과 인물에 대한 취재 경위, 촬영 목적 및 원칙, 매체에 담기지 않은 현장의 이면 등을 채록했다. 이를 통해 취재기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민주화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원하고, 시각 콘텐츠가 지닌 사료적 맥락을 실증하고자 했다.
구술채록 정보
- 구술자
- 정태원
- 면담자
- 정호기, 이영재
- 구술일자
- 2021.8.6.(1차), 8.7.(2차)
- 구술장소
- 전북 익산시 회의실
- 구술시간
- 411분
구술컬렉션 > 재야운동 > 부문
관련 구술아카이브
구술채록 내용
- 구술자 이력
1939. 전북 군산시에서 출생
1941. 중국 상해로 이주, 북경으로 이주.
1946. 12.경 중국 북경에서 인천항을 경유해 전북 군산시로 귀환
1952. - 1955. 군산 미군부대(비행장) 헌병대에서 업무보조원으로 근무
1955. - 1963. 경기도 동두천 소재 미군 7사단, 17연대 등에서 근무
1963. - 1967. 미 8군, UN군 사령부 휼병부 크래프트 샵 근무
1967. - 1976. 미국 국방부 성조(Starts and Stripes)지 한국지국 기자
1976. - 1986. 미국 UPI 통신사 한국지국 외신부장
1986. - 1994. 영국 뉴스통신사 로이터(Reuters) 한국지국 사진부장
1987. - 1989. 한국 외신기자 클럽 부회장
1994. 5. 은퇴
- 구술내용 요약
-
구술자 정태원은 1939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했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양자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증기기관을 다루는 기술을 습득하여 일본 회사 수송선의 기관장으로 근무했다. 일본과 목포 등을 왕래하던 중에 소개를 받아 목포에 거주하던 어머니를 만나 1938년에 결혼했다. 당시 해상 근무는 전쟁 국면으로 매우 위험했다. 그래서 결혼 후 아버지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인해 하선했다. 아버지는 중국 상해에서 근무하다가 북경 인근의 농장 관리인이 되었다. 구술자와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1940년경 북경으로 건너갔고, 광복이 되고 1년이 지난 이후까지 그곳에서 생활했다.
1946년 12월경 인천항으로 귀환했으며, 외가가 있던 군산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원래의 기술을 살려 어선의 선원이 되었다. 아버지가 탄 배는 6‧25전쟁기에 해군에 징발되었다. 안타깝게도 이 배가 어뢰에 맞았고, 아버지는 사망했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독일제 브로니카 카메라를 발견했다. 이 카메라로 사진의 세계에 입문했고, 사진촬영법을 습득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정 경제가 기울었다. 이모가 군산의 미군부대(비행장)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일자리를 찾아서 갔다가 헌병대 업무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헌병대 특무상사가 후원자였다. 이때부터 토니 정(Tony Chung)이라는 이름으로 생활했다. 후원자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고, 새로 부임한 후임자와는 정을 붙이지 못해 일을 그만두었다.
1955년에 경기도 동두천으로 올라가 미군 7사단에서 일하게 되었다. 군산의 미군부대에서 영어를 배웠던 덕분에 통역 관련 일을 하다가 미군 소속의 정규직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3년까지 17연대 크래프트 샵 등에서 근무했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는 상경하여 미 8군과 UN군 사령부의 휼병부에서 근무했으며, 이때 사진 촬영 기술을 심화할 수 있었다. 이때 미국인과의 인연으로 1967년부터 미국 국방부 성조(Stars and Stripes)지 한국지국 사진기자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진기자를 생각해보거나 교육받지 않은 관계로, 많은 역경을 딛고 기자, 특히 사진기자의 자세와 실무를 습득해야 했다. 성조지에서는 1976년까지 근무했는데, 자금난으로 인원이 축소되어 사직해야 했다. 이후 미국대사관에서 정보 수집 업무를 지원하는 일을 잠시 하다가 미국 UPI 통신사 한국지국 사진기자로 취업했다.
당시 외신기자와 국내기자의 취재 환경과 여건은 차이가 현저했다. 당국은 국내 언론사를 검열하고 통제했던 것처럼, 외신도 통제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었다. UPI에서는 1986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1994년 퇴임 시까지는 영국의 통신사 로이터(Reuters)에서 근무했다. 그러므로 UPI 재직 시에 부마항쟁, 5‧18민주화운동 등을 취재했고, 로이터 재직 시에 6월항쟁을 취재했다. 부마항쟁에서는 계엄군이 의도적으로 취재를 방해하고, 카메라를 부수기도 했다. 부마항쟁 직후에는 외신기자들도 취재가 제한되었다. 부마항쟁에 관한 해외 언론의 보도 사진은 부산역 앞 숙소에서 송신기로 보낸 것이다. 12‧12군사반란 시에는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탄 채로 남산 3호 터널에 갇히는 바람에 촬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황 전개에 관한 사진이 없고, 상황 이후의 사진만 있다.
5‧18민주화운동 초기 국면은 상황이 발생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지방신문 사진기자인 나경택과 신복진이 촬영한 사진이 외국 통신사에 전달되면서 상황을 인지했다. 계엄당국이 국내 방송과 언론사를 철저하게 통제한 결과였다. 바로 출발했는데, 어렵사리 광주로 내려갔다. 이미 며칠이 지난 이후였다. 시민과 시위대는 언론을 불신했으나, 외신기자들에게는 호의적이었다. 취재한 내용이 곧바로 해외 언론에 실렸기 때문에 신뢰했다. 5‧18민주화운동이 전개되는 동안에는 택시를 대절해 서울과 광주를 오가면서 취재했다. 전송기를 가져갈 수 없었고, 전화가 차단되어 송신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울발 사진 종합>에 실린 사진의 설명이 잘못된 경우도 있다. 광주에서 5월 26일 밤을 보내고 27일 진압상황을 지켜보았다.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기도 했다. 밤중에 진압작전이 전개되어 사진 촬영이 매우 어려웠다. 겨우 몇 장을 촬영했다. 진압작전이 마무리된 직후인 9시 30분경에 서울로 출발했다.
외신기자들은 2개국 이상이 연계된 사건을 주로 취재했다. 해외의 관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사회적으로 약자와 비주류에 관한 사진은 적은 편이다. 시위 사진이 많은 것은 당시 한국의 변화와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신기자의 취재 결과는 세계에 배포되는 것이므로, 국내기자의 취재에 비해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취재 현장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었다. 외신은 마감이 없다. 24시간 취재하고, 취재한 결과물이 송신되었다. 가장 빨리 보도하는 것이 의무여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취재한 사진은 한국지국장의 승인을 받아 해당 사진과 앞뒤 사진 총 3장을 홍콩 혹은 도쿄에 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필름의 복사본을 만드는 것은 규칙 위반이다. 따라서 본사로 보내진 원판 필름은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근무하던 당시 한국의 언론계에는 사진과 필름의 보관과 관리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오늘날에는 원판을 찾기가 어렵다.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사건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은 중앙일보가 아니라, 조선일보였다. 다른 사진이었으나, 두 사진 모두 구술자가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담는 것이다. 사건의 현장을 그대로 사진으로 보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촬영되고 선택된 사진은 기자의 시각과 안목이 담겨 있다. 특종 사진은 기자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신문사와 잡지사 그리고 독자가 함께 만드는 것이다. 보도를 위해 해외로 보낸 사진들은 원판을 찾기가 어렵다. UPI 통신사에는 거의 없는 것 같고, 로이터에는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보관한 사진과 필름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가장 잘 보관 및 관리해줄 것 같다는 판단에서 위탁했다.
- 하이라이트 영상 내용
- 5‧18민주화운동 초기 국면을 촬영한 사진이 해외 언론에 실리게 된 경위, 5‧18민주화운동 기사가 외신에 실리고 광주에 알려지면서 외신기자의 신뢰가 높아짐,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언론사, 시위현장 취재 이유와 시위 현장 취재에서 특종의 의미
- 녹취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