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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의 생활상

일제의 수탈로 인해 겨우 연명해오던 한국 민중들의 삶을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생계를 위해 고달픈 삶을 유지해야 했다.
남한의 경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대부분 소작농들이었다. 하지만 농지개혁이 유야무야 되어 이들의 삶을 사실상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다. 49년에 제정된 농지개혁법은 6.25를 거치면서 사실상 폐기되었고, 결국 60년대로 넘어와 형식적으로 실시되어 여전히 대부분의 농민들이 소작농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여성들의 경우도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우익 여성단체의 경우는 현모양처를 강조했고, 공창제 폐지를 주장하는 정도가 이들이 제기한 사회적 이슈였다. 반면 좌익 여성단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의 경제적 권리와 남녀평등 등 사회적 권리를 주장했다.
거리에는 전쟁으로 인한 대규모 고아의 창출과 경제적 터전과 노동능력을 상실한 수많은 걸인, 노숙자가 넘쳐났다. 전쟁미망인과 상이군경들도 커다란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일자리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수많은 실업자가 거리를 헤맸고, 지게꾼, 리어카꾼,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가 거리를 메웠다.
부족한 식량을 미국의 잉여농산물원조로 채우기 위해 밀가루 배급과 각종 식량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육열은 뜨겁게 끓어올라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했고, 교실 부족이 심각하게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부유층 자녀들이 일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서민들의 자녀들은 넘쳐나는 학생들로 인해 2부제, 3부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치맛바람이 이때부터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반공을 소리 높여 외쳤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찬양에 동원되었다.
세 끼 식사를 해결하기도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추석과 설에 고향을 찾는 민중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조상의 산소에 성묘하고 고향 어른을 찾아뵙는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 여겼던 우리 민족의 관습은 뿌리가 깊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민중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