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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로고

서울의 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때까지 한국은 긴급조치로 일관된 정치의 암흑기였는데, 10.26 사건을 계기로 암울한 유신체제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민주사회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넘쳤다. 이 시기에 절대 권력자가 사라짐에 따라 권력 내부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되며 신민당은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하였고, 유신체제로 인해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열망이 박정희 사망으로 인해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었다. 이 당시 학생들은 10.26 후의 개혁바람에 힘입어 ‘학원의 비민주적 적폐’를 시정할 호기가 성숙한데다, 과도체제를 장기화하려는 불투명한 정국, 오랫동안 제약됐던 비판의식의 해방감, 유신체제 아래서 정부시책에 지나치게 영합, 밀착했던 일부 학원재단에 대한 불신, 10.26 이래 오랜 겨울방학을 거쳐 새 학기를 맞은 계절감각 등이 복합적인 요인이 되어 학원가의 시위는 충분한 내연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유신체제에서의 경제상황은 특권과 특혜로 얽힌 정부 주도형으로서 경제가 권력의 손아귀에 있었고, 따라서 권력과 유착된 특권재벌 또는 대기업만이 성장하고 중소기업과 소비대중은 피해만 입었으며 그 결과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노동자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원인들로 인해 사회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민주화의 요구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던 것이다.
학생운동 진영의 민주화 요구는 학내민주화와 더불어 5월부터 비상계엄해제로 상징되는 정치민주화 요구로 본격적인 전환을 맞게 된다. 드디어‘ 서울의 봄 ’35개 대학 10만여명의 학생들이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서울역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오후에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이어지며 수백명이 연행되고 부상자만 23명이 나오는 치열한 시위였다. 이때 이미 광화문 일대에는 탱크와 함께 계엄군이 진주해 있었다. 그러나 회군파와 반회군파의 갈등과정에서 당시 학생운동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서울대 총학생회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하게되고 서울의 봄을 허망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 잘못된 판단이 역사의 추궁을 받기까지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전남대를 비롯해 광주에서 총궐기에 일어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