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4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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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2차정기총회 내용][수신:황인철,발신:한용희]
등록번호 : 00869242
날짜 : 1984.01.2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황인철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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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사회 연구회 총회자료
등록번호 : 00131169
날짜 : 1992.04.18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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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업사회연구회 창립5주년기념 학술대회 자료집 현단계 사회과학 논쟁의 쟁점
등록번호 : 00157495
날짜 : 1989.11.2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민주화운동자료관추진위...
요약설명 :
사료 콘텐츠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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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를 풍미한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
요약설명 : 평생 ‘보따리장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갔다. 이즈음 서울 상대 학생 서클인 후진경제연구회가 박현채를 초청했는데, 그는 이 모임에 나가 젊은 후배들과 열정적으로 토론하며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1964년 들어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사건을 조작 발표했을 때, 박현채는 중앙정보부와 검찰에서 각각 20여 일 동안 취조를 받으면서 잔인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다. 이듬해 1월에 무죄 선고를 받은 박현채는 도예종에 대한 은닉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그는 또다시 서울대, 홍익대, 국민대, 경희대, 충남대, 한신대 등의 시간강사로 밥벌이를 했다. 1970년대에 ‘민족경제론’의 포문을 열었던 박현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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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후의 수배자 윤한봉
요약설명 : 목숨 걸고 저놈들과 싸우겠다!”라고 선언한 그는 전남대 학생 동아리인 민족사연구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후배 정상용 등과 더불어 사회과학 공부와 학생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1974년 4월 들어 윤한봉은 민청학련사건으로 유신헌법반대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죄, 내란예비음모죄, 긴급조치 1호, 4호 위반죄 등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전남대에서 제적되었다. 이듬해 2월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그는 전남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종교계 및 재야인사들과 연대하여 청년운동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1980년 1월, 민주청년협의회 전남 책임자로 활동하던 윤한봉은...
구술 컬렉션 10건
더 보기일지사료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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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과학연구회, 민통련의 남북학생회담 제의 비판성명 발표
일자 : 1961.5.6
분류 : 통일운동과 혁신계활동 > 통일운동
요약설명 : 6일, 서울대학교사회과학연구회에서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연구회는 민통련의 남북교류론은 현 단계에서는 아연실색할 내용이라고 전제하고 학생의 본분을 망각한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연구회는 성명서를 통해 북한이 유엔으로부터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니 국제법상 유엔이 승인한 대한민국과의 협상 내지 교류는 불가하며, 북한과의 협상은 무모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북한에게 선전 자료를 제공하는 행위라고 말하였다. 또한 이론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학생들보다는 사회언론인들의 교류가 더 중요하므로 학생들은 행동을 삼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조선일보』 1961. 5. 7 조1면. 『대학신문』(1961. 5. 11 1면)은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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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생 800여 명, 6·3 이후 최초 대규모 학생 가두시위 ‘매국외교 결사 규탄성토대회...
일자 : 1965.3.31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삼천리강토와 한민족을 일제의 간악한 무리 앞에 미끼로 내어놓고 수억 불의 금액을 흥정하는 현 정부 처사를 성토한다. 신독점자본주의의 굴레에 얽매이려는 이 역사의 종말을 매국행위의 결과라고 단정한다면 우리의 판단이 그릇되었다 할 것인가? 일제의 쇠사슬에 내맡겨진 내 땅덩이 내 강토를 부둥켜안고 울분을 터뜨렸던 선열의 넋이 우리의 뇌리에 생동하는 한, 오늘의 우리의 구국행동이 계속되는 한 번영의 민주사회는 창조될 것이다.『동아일보』 1965.3.31 석1면, 『경향신문』 1965.3.31 석7면은 학생수를 1,000여 명으로 기재. 『전남매일신문』 1965.4.1 3면. 전남매일신문에서는 연행학생을 약 30명으로 보도. 전남대생 시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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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비교연구회 정부 지시에 따라 해체
일자 : 1965.9.16
분류 : 한일협정반대운동 > 학생
요약설명 : 발표에 따르면, “서울대 문리대 부교수 황성모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재학 시절부터 사회과학을 전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8월 초순 북한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였으며, 북한 보병 제19사단에 배속되어 분대장으로 남침 작전에 가담하는 등 대한민국에 적대행위를 적극 감행하였다. 그리고 1950년 10월 11일경 장단 지구 전선에서 유엔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 1952년 8월경 인민군 입대를 속여 민간인이라고 허위 진술함으로써 석방되었다. 이후 서울 풍문여고 교사로 있다가 1957년 8월 서독 훔볼트 재단의 장학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