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57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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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상록수문화사랑회 도서관추진대회 계획
등록번호 : 00001562
날짜 : 2000.03.0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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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상록수문화사랑회 추진대회 참석내빈명단
등록번호 : 00001563
날짜 : 2000.03.15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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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례 월 행사 예정서[ 평화모임,상록수회,새마음회 주제발표]
등록번호 : 00889914
날짜 : 1977.06.01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재)전태일 재단
요약설명 : 평화모임, 상록수회, 새마음회의 주제발표 예정서 -1970년~76년까지 연도 수 별로...
사진사료 2건
더 보기사료 콘텐츠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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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노동운동의 대모 - 조화순 목사
요약설명 : 상록수’를 읽고 농촌 계몽운동을 결심했던 것이 그가 걸어온 남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된 이후로 가지지 못한 자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읽으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상록수’의 여주인공에 감화를 받아 자신도 결혼하지 않을 거라 결심한대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했다. 사실 누구를 만나 연애감정을 키울 여유도 없이 투쟁 속에 살아온 세월이었다. 오빠와 남동생의 학비를 대느라 결혼 시기도 놓친 채 살아가는 여성노동자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사실 그 시절엔 조화순 목사뿐만 아니라 여성 활동가들 중에는 노동운동과 결혼을 했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며 투쟁의 현장에서 청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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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이야기
요약설명 : <상록수>를 따라 부르며, 비바람 불고 눈보라 쳐도 저 들판의 소나무처럼 푸르렀던 그녀의 삶을 애도했다. 빛의 결혼식 윤상원이 사망한 지 2년이 되어가던 1982년 2월 20일. 군사독재의 폭압처럼 매서운 겨울바람에 흙도 공기도 얼어붙은 듯 추운 날이었다. 광주항쟁으로 사망한 이들이 묻힌 망월동 공동묘지에서는 특이한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박기순과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이었다. 결혼식장에는 신방에 쓸 이불이며 옷가지가 두 영혼을 위해 마련되었다. 여느 결혼식처럼 친지와 벗들은 축의금을 내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양가의 가족친지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눈물로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영혼의 결혼식은 노래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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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을 위한 교사들의 외침 - 교육민주화선언
요약설명 : '상록수'와 '아침이슬'이 울려퍼지며 서명에 동의하는 교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교육민주화 만세'를 함께 외쳤다. [부산] 부산은 부산YMCA 강당에서 부산, 대구, 안동, 울산지역 교사 80여 명의 회원이 모여 행사를 했다. 이상석 회장이 교사의 날 취지 설명을 한 후 초청 연사 유상덕 선생의 「바람직한 교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강연을 듣고, 영남지역 회장 김관규 교사의 교육민주화 선언 낭독 및 채택의 시간을 가졌다. 선언문은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또렷하게 낭독이 되었고, 낭독이 끝나자 참석자 전원은 박수를 쳤다. 부산은 서명 대신 박수로 선언문을 채택했다. 교육민주화선언 김민곤 교사가 작성한 것으로...
구술 컬렉션 1건
더 보기일지사료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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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훈에 대한 첫 공판 개정
일자 : 1960.7.26
분류 : 과거사 진상규명운동
요약설명 : 연관설에 대해 1957년 3월경 무교동 상록수다방에서 김형근을 비롯한 사법보호위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준연 선생이 동아일보사 중역실에서 이번에는 천하의 조봉암도 죽게끔 되어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라고 김지웅이 말하는 것을 들었고, 역시 조선호텔 앞 아카데미다방에서 김지웅이 어떤 사람과 “동경에서 장경근·김준연 씨 등이 모여 이미 이야기가 다 됐어. 자유당 강경파·민주당 구파할 것 없이 문제없어 운운”하는 말을 듣고 이를 종합한 결과 사건에 김준연이 연관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하였다. 또한 고정훈은 고 김창룡 중장이 신익희·장면을 공산당으로 몰아 죽이려고 했으며 본인에게 “조봉암과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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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생 10명 연행 조사
일자 : 1971.6.3
분류 : 분류없음 > 학생
요약설명 :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3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무기정학 처분당한 최회원 군 등 10명을 연행, 데모 주동 혐의 등을 조사 중이다. 이 학생들은 2일 낮 12시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학생처벌을 백지화하라는 등의 성명서를 발표한 후 이날 하오 3시 반쯤 성북구 미아동 상록수다방에서 다시 모임을 가지려다 기동경찰 20여 명에 의해 연행된 것이다.『경향신문』 1971.6.3. 7면; 『매일신문』 1971.6.5. 7면; 『영남일보』 1971.6.5. 7면; 『국제신보』 1971.6.4. 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