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사료 3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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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판자촌 빈민선교 보고
등록번호 : 00872511
날짜 : 1974.09.06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김학민
요약설명 : 현장에 뛰어든 동기 청계천 판자촌 빈민선교 보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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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권의 역사적 전개-서울 판자촌 세입자를 중심으로
등록번호 : 00021579
날짜 : 1992.09.04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도시연구소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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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재개발인가? - 사당동 판자촌 강제 철거사건 진상보고서
등록번호 : 00048063
날짜 : 1981.12.10
구분 : 문서류 > 문서
기증자 : 한국도시연구소
요약설명 :
사진사료 6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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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이 번지는 후암동 판자촌
등록번호 : 00727596
날짜 : 1979.05.0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5일 어린이 날 후암동 판자촌에서 큰불이 나 105채를 태우고 800명의 이재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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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촌의 철거에 동원된 건설용 중장비
등록번호 : 00701325
날짜 : 1987.04.15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박용수
요약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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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허가 판자촌 철거에 항의하려 시청으로 몰려든 시민들
등록번호 : 00714457
날짜 : 1968.04.01
구분 : 문서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사료 콘텐츠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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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자식들의 아버지 - 허병섭 목사
요약설명 : 판자촌은 온갖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들어 하루살이 같은 삶은 이어가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여느 판자촌하고는 달리 창녀, 기둥서방, 넝마주이, 깡패 등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한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까지 받은 그가 입대한 뒤 휴가를 나올 때마다 친구인 이규상 전도사를 만나러 가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사회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제대 후 그도 역시 이 전도사와 함께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에 들어가 빈민 선교를 시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기도를 실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냄새나고 좁아터진 골목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판이 벌어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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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상계동 철거민투쟁
요약설명 : 이곳에 모여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하며 살았다. 이때부터 이들은 안양천을 옆에 끼고 형성된 긴 뚝방촌에 모여 살게 되었다. 5월 11일, 서울시는 돌연 “목동에 10~15평의 서민형 아파트 대신 20~58평형의 아파트를 짓겠다.”라며 한 달 전과는 판이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들은 무허가 건물에서 살고 있다. 지금껏 살게 해준 것을 감사히 생각하라. 다만 배려 차원에서 가옥 당 이주비 50만원과 아파트 입주권을 줄 것이며, 입주권이나 이주비는 철거 확인 후에 주겠다.”라고 폭탄선언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다가올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재정을 확충하고자 당시 김성배 서울시장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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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요약설명 : 무렵에 일어난 광주대단지사건 역시 서울의 판자촌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을 무리하게 경기도 광주군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었다. 1970년 4월 8일, 마포구 창천동의 와우산 산비탈에 들어선 와우시민아파트 한 동이 와르르 무너졌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판자촌 정리가 목적이었던 서울시의 시민아파트 건립사업은 서민들에게 싼 값에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명목으로 시행되었다. 5층으로 지어진 와우아파트는 당시로서는 고층건물에 속했는데, 애초에 안전성 자체가 담보되지 않은 부실공사였음이 사고를 통해 드러났다. 와우아파트는 70도 가까운 경사진 비탈에 세워졌으나, 와우산의 지질이 화강암이라는 이유로...
구술 컬렉션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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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변 판자촌 철거로 철거반과 주민 충돌
일자 : 1970.4.29
분류 : 분류없음 > 기층민중
요약설명 : 2시간 동안 대치하며 충돌하였다. 철거반은 판자촌 입구에 블록벽돌로 바리게이트를 쌓고, 대못을 박은 몽둥이와 돌, 오물, 깨진 병 등을 던지며 대항하던 주민들을 몰고 들어가 철거작업을 강행했다. 이 지역은 지난 12일 밤 화재로 불타버린 판자촌으로 그동안 주민들은 구청의 감시 소홀을 틈타 670채의 블록판잣집을 새로 지어 이날 구청에서는 계고장도 없이 철거에 나선 것이다. 한편 시당국은 이 일대 670채(997가구) 주민 4,700명을 서울시가 정지작업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주택단지에 가구당 20평씩 주어 이주시키고 이 지역에는 40여 채의 시민아파트를 연내에 지을 예정이다.『경향신문』 1970.4.29. 7면; 『동아일보』 19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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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일대 판자촌 철거 두고 주민·구청 대립
일자 : 1970.11.11
분류 : 분류없음 > 기층민중
요약설명 :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판자촌을 철거한 서울 영등포구 사당동 22 일대에 11일 상오 현재 200동 가량이 다시 들어섰다. 주민들은 주거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다시 움막집을 지은 것으로 주장했다. 반면 구청 측은 이들 주민이 대부분 지능적으로 버텨 광주대단지의 땅을 분양받는 등 혜택을 받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않은 것으로 말했다.『경향신문』 1970.11.1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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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구 무허가 판자촌 철거를 둘러싸고 철거반원과 주민들 충돌
일자 : 1971.6.9
분류 : 분류없음 > 기층민중
요약설명 : 9일 하오 5시 30분경 서울 연희동 산66 일대 무허가 판자촌에서 서대문구청 철거반원 20여 명과 이를 저지하는 주민이 충돌, 서로 몽둥이를 휘둘러 주민 3명, 철거반원 3명 등 6명이 중상을 입었다. 주민들은 “서대문구청이 선거기간 동안 이 지역 판잣집을 양성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하고 갑자기 철거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구청 측은 “이 구역은 선거 후의 신발생구역이므로 양성화 계획에 들어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이 충돌로 철거반은 1동만 철거할 수 있었다.『자유의 종』 20, 1971.6.21. 3면